이를테면 보드게임. 모험가가 될 것인가 은둔자가 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 있다고 하자. 나는 주저 없이 은둔자를 택하는 타입이다.'그런 의미에서 이날은 평범하고도 좋은 날이었다.'2월의 첫 주답게 아직 날씨가 몹시 추워서 바깥나들이를 할 상황은 아니라 이날 식구들은 대개 집을 지키고 있었다. 네 명의 식구 중에서 셋이 날이 저물도록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으니 대개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이다.'“늦으려나.”'체스를 두던 아저씨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때까지 별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아 공연히 체스 판만 노려보고 있던 내가 대꾸했다.'“나이가 있잖아요. 식구끼리 여는 생일파티에 허겁지겁 달려올 시기는 지났죠.”'“어머나, 그런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해버리다니. 역시 여자는 어려도 잔혹하다니까.”'마실 걸 가지고 오시던 아주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바람에 나는 졸지에 잔혹한 여자가 되었다. 체스 판 옆으로 작은 탁자를 끌어와 아주머니가 쟁반을 놓을 자리를 만들었다. 쟁반 위에는 막 갈아낸 과일주스 세 잔이 있었다. 아주머니가 늘 드시는 토마토 주스를 제외한 딸기 주스 두 잔 중 하나를 먼저 아저씨에게 드리는데 아저씨가 손사래를 쳤다.'“나는 생각 없다니까. 아침이면 몰라도 다 늦게 무슨 이런 걸 마시래.”'“마셔둬서 나쁠 게 뭐예요? 누구 덕에 당신이 그 나이 되도록 변비랑 인연 없이 사는지 잊은 거 아니에요?”'“아니 글쎄 여자도 아니고 남자는 어지간해선 변비 같은 거랑은 인연이……. 아니야, 마셔. 마시겠다고.”'그렇게 한 번 자기주장을 해보려던 아저씨의 봉기는 아주머니의 옆으로 흘겨보기 한 방에 수포로 돌아갔다. 이걸로 2월 봉기 또한 실패. 달마다 한 번씩 아저씨의 안에서 눈을 뜨는 반골정신은 그 멘탈이 너무도 미약하다. 나는 딸기주스를 홀짝거리며 슬며시 웃었다.'아주머니 앞에서 저렇게 소심하신 분이 어떻게 삼십 년 가까이 기업을 꾸려온 오너로 활약할 수 있었는지, 그것이 내게는 불가사의에 가깝다. 직원 수가 백오십 명 남짓 되는 작은 무역회사였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장인과 처남 하나, 그리고 아저씨 세 사람이 초기 직원의 전부였던 도매상을 그만큼 키워낸 것에는 단순히 성실함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이제 나이 육십삼 세로, 정년퇴직을 하기에도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이미 지난해 초에 전문경영인을 들이고 자신은 자문이사로 물러나셨다. 여전히 회사에는 매일같이 출근이시지만 그 전에 비하면 확실히 한가하게 지내시는 게 눈에 보인다.'지금처럼 나를 상대로 이렇게 체스를 두실 여유라니, 재작년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게다가 작년에는 나랑 여헌이가 고3이었으니 아저씨가 한가해도 우리가 아저씨 얼굴 볼 틈이 제대로 없었다.'수능이 끝나고 비로소 한숨 돌릴 시기가 왔지만 아저씨 상대는 아들인 여헌이가 아닌 내 몫이 되었다. 어쩔 수가 없다. 절대적인 친구 숫자의 차이하며 야외활동에 대한 갈망도의 차이에서 나와 소여헌은 비교거리가 되지 않는다. 인기남이 바쁘신 동안, 나라도 착실하게 피부양자로서 부양자에 대한 의무를 다 하고 있다.'아, 그런데 별로 의무라고 생각해서 기합이 들어가 있지도 않다. 아저씨는 보통 무척 과묵한 편이시고 어쩌다 하시는 말씀도 감정적인 언사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딱딱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은 그 표정 때문일 것이다. 듬직하면서도 푸근하게 느껴지는 인상은 금세라도 빙긋이 웃을 것 같은 모습이다. 아주머니 말로는 젊은 시절엔 은근히 눈웃음을 잘 치는 남자였다고 하는데, 세월과 함께 그 은근함은 모습을 감추었어도 흔적이 눈가에 남아 있다. 웃기 좋게 자리 잡은 눈가의 주름으로 인해 아저씨가 이따금 웃을 때면 영화배우 안성기와 얼핏 닮았다는 느낌까지 준다.'그리고 그건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던지 회사의 여직원들 사이에서도 그런 식으로 불리는 일이 꽤 있다고 한다. 그렇게 불린다고 해도 크게 욕이 될 일은 없는 것이 아저씨는 그 나이대를 두고 생각해봐도 상당한 미남이다. 굳이 염색을 하지 않아도 아직껏 머리카락은 검은 색이 더 많고 숱도 풍성하다. 눈빛도 형형하시고 꽤 말끔한 피부에는 주름은 있을지언정 검버섯도 없다. 오십대 초반까지도 보아줄 외모에 분위기 있는 중년의 미남이라고 내가 단언한다면 역시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 격인 걸까.'‘꼭 그렇지도 않지.’'나는 이번엔 아주머니를 보았다. 깊은 주름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희고 광채가 나는 피부하며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첫눈에 ‘참 곱다’소리가 절로 나게 생기신 분이다. 아마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 본다 쳐도 이분의 실제 나이인 쉰여섯을 딱 집어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젊은 시절의 미남미녀가 인생을 순탄히 잘 산다면 이렇게 늙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부부가 아닐 수 없다. 밝고 부지런한 성정은 부부가 쌍둥이처럼 닮았고 또 사람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존재여야 한다는 가훈대로 오래전부터 꾸준히 해온 봉사활동만 봐도 두 분의 선량함은 보증수표이다.'그러나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꽃길만 걸어왔다는 뜻은 아니다. 원앙처럼 금슬 좋은 이들 부부도 적잖이 속을 끓였던 것이 있으니 그것은 도무지 소식이 없는 2세 문제였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결혼한 것은 서로가 스물일곱, 스무 살일 때의 일이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이 마흔셋, 서른여섯이 되도록 좋은 소식이 찾아오지 않은 것이다. 지금이야 자식이 없으면 없는 대로, 혹은 입양을 해보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아저씨, 아주머니의 세대에는 그것이 그렇지만도 않았을 것이다. 아저씨가 수더분한 분이시라 아주머니에게 대놓고 내색은 안 했다고 해도 아주머니가 얼마나 속을 끓이셨을지 얼마쯤은 짐작할 수 있다.'그러다가 아주머니 나이 서른일곱에 임신소식이 찾아왔다. 태몽은 바다에 핀 휘황찬란한 흰 옥으로 된 연꽃. 틀림없이 예쁜 여자아이일 거라고 두 분은 생각하셨단다. 그래서 준비된 태명은 윤희.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실제로 본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영화배우 정윤희를 기념하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었다.'마침내 아주머니가 십삼 년을 하루 같이 들인 불공에 대한 보답이 십구 년 전의 오늘 도착했다. 여자아이보다 어여쁜 남자아이, 소여헌의 탄생이었다.'아저씨가 출생신고를 위해 부랴부랴 여헌이라고 이름을 짓긴 했지만 어린 시절 집에서 부른 여헌의 이름은 윤희였다. 요즘도 아주머니는 여헌을 ‘윤희’라고 부르고는 한다.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는 가정 내 비밀인데 내가 그것을 아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란 것은 참 유감천만이다. 그리고 그 점은 여헌도 유감으로 여길 게 틀림…….'“다녀왔습니다.”'불쑥 등 뒤에서 들려온 여헌의 목소리에 나는 지레 제발이 저려서 빠각, 하고 컵 주둥이 부분을 씹고 말았다. 놀랍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대체 언제 들어온 거지?'“어머, 밖에 눈 오니?”'“네. 와요.”'“그래도 그렇지 집에 들어오기 전에 좀 털고 올 것이지, 윤희 넌 어째 매번 말해도 그때뿐이니?”'아주머니가 급하게 일어나 여헌에게 다가가며 잔소리를 하는 동안 여헌은 미간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그놈의 윤희란 소리 좀.”'“2월 중순 다 돼서 무슨 눈이 이렇게 왔대? 입춘 지난 게 언젠데.”'아주 쿨하게 여헌의 말을 무시하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새삼 어머니는 강하다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헌이 비니를 벗는 동안 아주머니는 여헌의 목도리며 다운점퍼를 벗겨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을 안 털고 들어왔다는 소리를 세 번은 더 했을 것이다.'“신발도 눈 묻은 채로 그대로 들어왔지? 현관에 물 생긴다고 그렇게 말해도 안 듣지. 다른 일에선 꼼꼼하면서 이런 일에 칠칠치 못한 건 어찌 그리 부자가 붕어빵인지 몰라.”'“다른 좋은 점도 많은데 꼭 마음에 안 드는 건 날 닮았다지.”'옆에서 아저씨가 못마땅한 듯 한마디 했지만 아주머니는 그것도 무시했다.'“남자는 좀 털털해서 나쁠 거 없지만 그래도 비 맞은 우산이며 눈 묻은 신발 밖에서 털고 들어오는 정도는 기본 에티켓이야. 그런 작은 일에 신경을 써야 마누라한테 점수를 따지. 안 그러니, 혜석아?”'비니에 눌렸던 머리를 강아지처럼 터는 여헌을 앞에 두고 갑자기 아주머니의 질문의 화살이 내게로 향했다. 이럴 때 그러게나 말이죠, 하고 동조하는 것이 내 역할이란 것은 알지만 이번엔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물론 동의한다는 듯 의미심장한 눈빛은 보냈다. 하지만 그것을 단번에 여헌이 다른 뜻으로 왜곡시켰다.'“혜석이한테 그런 사소한 일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요. 엄마 같은 줄 알아요.”'“어머, 혜석아. 이 녀석이 지금 우릴 이간질한다.”'아주머니의 호들갑에 나는 별 수 없이 여헌을 보며 한마디 했다.'“못됐군요.”'“그러게. 들었지? 그런 사소한 일 따위라니. 건방지기까지 해.”'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빗어 넘기던 여헌이 아저씨를 향해 말했다.'“대장, 보고만 있기에요? 나 협공당하고 있다고요.”'“앞뒤로 막히면 옆으로 피해.”'아저씨는 딸기주스의 마지막 한 모금을 깨끗하게 비우면서 대답했다. 여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아저씨 말대로 슬쩍 옆으로 빠져나갔다.'“윤희야, 현관에 가서 물기부터 제대로 닦아 놔야지.”'“윤희야, 들었지? 가서 현관 정리해!”'마치 자신이 윤희가 아닌 것처럼 여헌이 크게 외치며 욕실로 향했다. 아주머니가 저것 좀 보란 듯이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다시 한 번 두 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겠어요, 저게 아주머니의 금지옥엽 소여헌인데, 라는 뜻을 담아.'“하여간에 남자는 아무리 커도 애라니까.”'아주머니도 곧 그 뜻을 접수하고는 빙긋이 웃으면서 현관으로 몸을 돌렸다. 아들 녀석 때문에 눈 녹은 물이 흥건할 현관을 청소하러 가는 표정치고는 못내 즐거워 보인다. 실은 그렇게 잔일이 생기는 것이 좋은 것이다. 다 큰 아들 주제에 아직 엄마 손이 가야 할 일을 만들고 다니는 것이 아주머니의 삶에 비타민 같은 활력소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그리고 내가 알 정도의 일이라면 여헌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녀석은, 똑똑하니까.'“이놈의 과일주스란 건 먹고 나면 영 입이 텁텁해서. 이래서야 케이크까지 먹고 나면 내 당 수치가 훌쩍 뛰겠구나.”'“누가 들으면 당뇨 환자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아저씨.”'“내 나이쯤 되면 다 위험한 법이야. 자, 물 좀 마시러 갈까나.”'아저씨는 물을 핑계로 주방으로 향했다. 실은 아주머니보다 먼저 생일파티 준비를 하러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