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그라지기를 원하는 몸뚱어리를 겨우 일으켜 세웠다. 반듯하게 몸을 꾸밀수록 반달 같은 이마 위로 식은땀만 더해 간다. 밖에서 채근하는 이를 위해 섬돌 아래로 겨우 내려섰다. 쇠약하여 따사로운 햇살에도 오소소 몸이 식는다. 그리 병약함에도 몸에 밴 우아한 몸짓으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떠나거라.”

“…….”

그럴 수 없어 고개를 들었다. 내려다보는 강렬한 여인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젖어 드는 눈으로 간절하게 애원해 보았다. 그러나 거스를 수 없는 대찬 여인의 기세는 병색이 또렷한 소녀의 가슴을 아프게 관통했다. 소녀가 겨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랫입술을 물며 눈물을 참아 내는 것 밖에는 없었다.

“여봐라.”

“예!”

“당장 이 아이를 마차에 태워라.”

결국 거부할 수 없는 존귀한 여인의 명이 떨어졌다. 곁을 지키고 섰던 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병약한 소녀의 몸이 가뿐히 들려 강제로 마차에 태워졌다.

“마마! 차라리 소녀에게 죄를 물어 죽여주세요. 오라버니가 잠든 그 곁으로 가고 싶나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셔 스스로는 못 가오나 곧 떠날 몸이옵니다. 부디 먼 곳으로만 떼어 내지 말아 주세요. 마마!”

소녀의 외침에도 여인의 단호한 눈짓 하나에 마차의 문이 단단히 잠겼다. 귀에 아프게 박히는 소리에 강철처럼 서 있던 여인은 목이 메어 왔다. 그 문을 없는 힘으로 부술 듯 때리는 소녀의 주먹이 가엾다. 먹은 맘이 무너질까 두렵다. 여인은 더욱 독해진 얼굴로 기어이 모진 말을 내뱉고 말았다.

“돌아온다면 네 부모의 죄까지 청하여 기필코 용서치 않으리니. 혼백으로라도 돌아오지 말거라! 황후마마의 당부만 아니었다면, 내 이 두 손으로 널 단죄하고 싶다만. 그러니 두 번 다시는 만나지 말자꾸나.”

심장 대신 손 안에서 찢기던 고귀한 여인의 손수건이 자꾸만 붉어지는 눈시울을 찍었다. 그러나 또다시 입매를 단단하게 굳힌 여인은 강한 눈짓으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이내 소녀를 가두듯 태운 마차가 덜그럭 굴러가더니 하늘 높이 뻗은 대문 사이를 빠져나갔다.

“소녀야!”

젖어 든 손수건만 비틀며 심장으로 울던 여인이 기어이 자리를 박찼다. 마차를 잡을 듯 달려 나가는 여인의 뒤로 궁녀들이 우르르 따랐다. 고귀한 여인이 떠난 자리에는 애달픈 이별에 젖어 들던 비단 손수건 한 장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소녀야. 다 부질없다. 그러니 돌아오지 마라. 모진 세상이라도 좋으니, 살아가렴. 생이별하는 사람의 마음 같은 건 몰라도 되니, 부디 그곳에서 꽃피우거라.’

#[1]

궁 안의 널따란 화원 가득 피어난 매화 향을 둘이서만 독차지하고 있자니 술 맛조차 진하게 와 닿는 밤. 비운지 금방이건만 쪼르르 맑은 술이 잔 가득 다시 담겼다. 다시금 건네지는 술잔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 들었다. 곧장 잔을 비워 낸 이는 되돌려 준 빈잔 안으로 맑은 술을 가득 채워 놓았다.

“강나라 황실에 피바람이 불었다지.”

거만하게 술잔을 들어 올린 백화국 왕 진소제가 기분이 좋아진 듯 입 안으로 술을 툭 털어 넣었다. 빈 왕의 잔에 다시금 술을 채워 주고 있는 이는 그의 아우 진소륜이다. 얼굴에는 티끌만 한 감정 하나 담겨 있지 않아 언제나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해 보이는 동생이다.

“2황자를 독살한 황태자 부부라……. 아니지! 황태자비 혼자서 그리한 것인데 황태자는 운 없이 엮인 것이지. 어쨌든 폐위된 황태자 부부는 궁 밖으로 쫓겨나고, 비어 버린 황태자 자리에는 이제 겨우 세 살인 귀비의 아들이 오를 거라 한다.”

가장 엄격하고 경계가 삼엄한 궁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하나, 우습게도 궁 안에서는 발각되지만 않을 뿐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났다. 왕은 씁쓸한 듯 고소한 듯 술잔을 들어 입 안에 들이부었다.

“2황자가 사랑했던 여인이 절세가인이라고 하더구나. 천하에 다시없을 귀인이라던 그 여인이 저주가 되다니. 정인의 바람대로 살기 위해서 황태자 자리에서 과감히 내려와 1황자에게 내주었는데, 대가는 죽음이라.”

듣고만 있는 소륜이 비어 버린 왕의 술잔을 채워 주고 자신의 빈 잔에도 술을 따랐다. 고요히 잔을 들어 깔끔하게 비워 내는 동생이 가끔은 땅에 떨어진 신선이 아닐까 의심하던 형님의 눈썹 하나가 심술 맞게 밀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