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따윈!'소년은 작은 주먹을 꾹 쥐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학교 따윈,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소년은 큰형을 떠올렸다. 큰형은 또 밤을 새운 모양인지 오늘도 피로에 찌든 얼굴로 오래된 양은 도시락을 건네주고 새벽에 출근했다.''“미안하구나.”''무엇을 사과하는 건지 소년은 잘 알고 있었다. 도시락에는 배를 반도 채울 수 없는 양의 보리밥과 김치 쪼가리만 들어 있으니까. 그렇지만 급작스러운 뺑소니 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며 나머지 형제들을 부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감히 불평한단 말인가?'하지만 이런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는…….'소년은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마음을 다졌다. 학교에 가는 건 죽기보다 싫었지만 빼먹는 건 큰형을 실망시키는 짓이었다.'한참 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소년은 방으로 돌아왔다. 형들에게 물려받은 오래된 교과서와 반쯤 갈라진 몽당연필 등을 주섬주섬 가방에 챙겼다. 구멍이 난 부분을 애써 감춰서 메고는 두 살 아래의 쌍둥이 동생들에게 갔다.'“세수 제대로 안 했구나.”'소년은 픽 웃은 뒤 수건을 가져와 막냇동생의 얼굴을 뽀득뽀득하게 닦아 주었다. 비록 구겨지고 낡은 옷을 입었다지만 몸은 깨끗해야 했다.'“자, 가자.”'소년은 손을 내밀었고, 쌍둥이는 망설이다가 한 손씩 잡았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는 대신 조심스럽게 말했다.'“저기, 오빠. 학교 안 가면 안 돼? 가기 싫어.”'“나도. 애들이 거지라고 놀려. 형, 가지 말자. 응?”'쌍둥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소년에게 애원했다. 소년은 울컥하고 치솟은 감정을 애써 누르고는 고개를 저었다.'“안 돼. 가야 돼. 안 가면 큰형이 슬퍼할 거야.”'큰형을 입에 올리자 쌍둥이들은 고개를 바닥으로 뚝 떨어뜨렸다. 소년은 쌍둥이와 맞잡은 손에 힘을 꾹 준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침 일찍 나와서 그런지 다행히 등굣길에서 악마들과 마주치지 않았다. 소년은 동생들을 교실에 들여보낸 뒤 아주 천천히 6학년 3반으로 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거지 왔네.”'문을 열자마자 비웃음이 날아들었다. 교실 안에는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소년은 이를 악물며 이수환을 노려보았다. 학교 재단 이사장의 손자라서 선생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녀석. 그리고 매일 소년에게 악담을 퍼붓는 악마 중에 악마.'“또 어제랑 같은 옷 입고 왔네? 구멍이라도 좀 기우지 그래?”'수환은 낄낄거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소년은 모멸감으로 떨리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자리로 가서 앉았다. 수환은 졸졸 따라오더니 옆자리에 앉아 얼굴을 찌푸리며 코를 잡았다.'“아우, 냄새나. 거지야, 씻긴 씻냐? 아, 수돗물 살 돈도 없지?”'“이수환!”'문이 쾅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고, 예상한 얼굴을 발견했다.'하늘거리는 레이스가 달린 공주님 옷을 입고 있는 여자아이. 뽀얀 얼굴과 긴 속눈썹, 가는 팔과 다리를 가진 소녀는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또 승운이 괴롭히는 거야?”'“괴롭히긴 뭘 괴롭혀?”'수환은 그렇게 툴툴거렸으나 소년을 대할 때와는 달리 주눅이 든 말투였다. 하지만 다시 소년에게 윽박질렀다.'“야, 박승운! 말해 봐! 내가 괴롭혔어?”'소년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녀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수환의 눈앞으로 불끈 쥔 주먹을 내밀었다. 앙증맞은 크기였으나 힘과 박력이 실려 있었다.'“내가 승운이 또 괴롭히면 가만 안 둔다고 했지?”'“야! 내가 이 거지를 괴롭히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거지? 누가 거지야?”'소녀는 주먹을 휘둘렀다. 수환은 어깨를 정통으로 얻어맞자 비틀거렸고, 소년은 쾌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이, 이 계집애가!”'“계집애라고?”'욱하는 표정으로 소녀는 한 대 더 때렸다. 이번엔 퍽 소리가 날 정도였는데 수환은 어지간히 아픈지 눈물을 글썽거렸다.'“흥. 겨우 그거 맞았다고 우냐? 사내자식이 허약해서.”'“내가 허약하긴 뭐가 허약해! 너, 너 두고 봐!”'수환은 눈물을 줄줄 흘리더니 문밖으로 쌩하니 도망쳤다. 소녀는 다시 콧방귀를 뀌었으나, 손바닥을 뒤집듯이 순식간에 표정을 얌전하게 바꾸고는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승운아, 괜찮아?”'소년은 고개를 홱 돌려 소녀를 외면했다. 소녀는 실망한 듯 잠시 입을 오물거렸지만 예쁜 그림이 그려진 도시락 가방을 소년에게 들이밀었다.'“너 또 아침 못 먹고 왔지? 이거 먹어. 도우미 아줌마한테 말해서 밥 많이 싸왔어. 너 소시지 먹어 본 적 있어? 되게 맛있다?”'소년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자 소녀는 종알종알 말하며 커다란 도시락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윤기 있는 쌀밥과 두툼한 계란말이 옆에는 문어 모양의 귀여운 소시지가 잔뜩 들어 있었다.'소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탐스러운 소시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소녀는 빙긋 웃더니 플라스틱의 예쁜 새 젓가락을 꺼내 소년에게 내밀었다.'“자, 먹어.”'소년의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막 젓가락에 손끝이 닿았을 때였다. 문이 다시 벌컥 열리더니, 수환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며 소리쳤다.'“봐! 남의 도시락을 먹으려고 하다니 박승운 쟤 거지 맞잖아! 너 거지한테 계속 그럴 거야, 오미래?”''승운은 눈을 떴다. 시리도록 차가운 보랏빛의 사이킥 조명이 침범하듯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승운은 거칠게 눈을 부비며 소파에서 등을 뗐다.'“일어났냐?”'룸 밖에선 귀를 찢을 듯이 음악이 크게 울리고 있었지만 안에서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승운은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리며 건너편에 앉아 있는 친구들을 보았다.'“그렇게 피곤했어? 잘 자더만.”'“쿨쿨 자던데, 꿈이라도 꿨냐?”'승운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어, 진짜?”'“응. 옛날…… 꿈을 꿨네.”'승운은 읊조리듯 말하며 손을 뻗었다. 커다란 잔에 넘칠 듯 가득 차 있던 진한 호박빛의 술은 곧 몸 안으로 빨려들 듯 흡수되었다. 타는 듯한 열기가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오자 꿈을 꾸는 사이 온몸을 습격했던 냉기가 사라져 갔다.'“피곤하면 이만 들어가. 개업 준비 때문에 힘들지?”'사려 깊은 성격의 한 친구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하지만 여자 밝히기로 소문난 다른 친구가 승운의 팔을 붙잡았다.'“야, 좀만 더 이따 가. 너 없으면 여자들이 안 낚여.”'“이 자식 있으면 더 안 낚일걸? 여자들이 얘한테만 눈 돌아가잖아. 인마, 피곤한 거 같은데 그냥 가.”'퉁명스러웠으나 배려하는 말이라는 걸 승운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씩 웃은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다음에 보자. 나 때문에 모인 건데 미안하다.”'“미안하긴, 바쁜데 불러내서 우리가 더 미안하다, 야.”'“피곤해 보이는데 가서 푹 쉬어.”'제각기 다른 성격의 친구들은 아쉬움과 걱정의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가 나갈 때 어깨를 툭툭 때리기도 했는데, 애정의 손길이라는 것을 승운은 잘 알고 있었다. 치과대학교 시절 사귄, 힘들게 공부하며 함께 성장한 진짜 친구들. 국민학교 때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던 악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승운은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거세게 주먹을 꾹 쥐고는 룸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귀를 먹먹하게 만들 만큼 거대한 음악 소리가 온몸을 때렸고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강렬한 조명 때문에 앞의 광경도 잘 볼 수가 없었다.'“헤이!”'간신히 눈을 뜬 승운이 파도의 장벽처럼 넘실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한 걸음씩 걸을 때, 그의 얼굴을 본 여자가 감탄한 기색으로 팔을 잡아당겼다.'“너 멋지다! 나랑 잘래?”'승운은 얼음보다 더 차가운 표정을 보여주며 가슴을 더듬는 여자의 팔을 잡아 튕기듯 물리쳤다. 여자는 움찔거리며 물러났고, 승운은 시선 하나 남겨 놓지 않은 채 차가운 표정 그대로 등을 돌리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가장자리에 있는 바(bar)에 도착한 뒤, 매니저를 불렀다.'“벌써 가세요? 오신 지 한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좀 피곤해서. 7번 룸 말이야, 이제까지 먹은 술값은 내가 낼게. 내가 모이자고 한 거거든.”'음악 소리 때문에 크게 말하면서 카드를 건네주자 매니저가 손을 내저었다.'“못 받아요. 저번에 술값 받았다고 사장님한테 혼났어요. 그냥 가세요.”'이 ‘붉은 밤’ 클럽의 사장은 승운의 막냇동생의 약혼자, 즉 예비 제부였다.'“네 사장한테는 내가 말할게. 받아.”'매니저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승운이 재촉하자 결국 카드를 받았다.'“잠시만 앉아 계세요. 대리운전 불러 드릴게요.”'“아냐. 차 안 가져왔어.”'“그럼 택시 불러 드릴게요.”'승운은 고개를 저은 뒤 클럽 밖으로 나섰다.'문을 열자마자 12월의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습격해 왔다. 피부가 시릴 정도로 바람은 냉랭했지만, 덕분에 꿈 때문에 쌓인 어두운 감정과 알코올이 주는 특유의 불편한 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잠시 냉기를 즐긴 승운은 클럽과 다른 건물의 틈 사이로 갔다. 한 3분쯤 걸었을까. 시끄러운 차 경적 소리가 잠시 끊어졌을 때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싫다고 했잖아.”'“계집애들은 꼭 좋으면서 싫다고 튕기더라.”'여자의 단호한 말에 이어 남자의 불량한 목소리가 퍼졌다. 승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 건물 뒤편의 후미진 곳이었다. 여자는 최고급 승용차의 운전석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 생각이었는지 손에는 키가 들려 있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건들거리는 자세의 한 남자가 가로막듯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튕기는 거 아니거든? 난 정말 네가 싫어.”'승운은 천천히 걸어갔다. 남자의 등 옆으로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짜증으로 가득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모키 화장을 했음에도 얌전하고 단정해 보이는 이목구비에는 귀찮아 죽겠다는 생각이 풀풀 날리고 있었다.'“싫긴 뭐가 싫어? 이 시간에 클럽에 온 거 보면 목적이 뻔한데. 그만 튕기고 나랑 가자. 나 정말 끝내주게 잘해.”'“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난 정말 네가 싫어. 좀 꺼져 줄래?”'여자의 다소 험악한 말에도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반응이 재밌는지 고개를 끄덕끄덕이더니 두 손을 여자의 가슴에 댔다. 승운이 막 나서려고 할 때였다.'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