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은이 KK제과 채준헌 사장의 집으로 오게 된 것은 햇수로 5년, 정확히 말하면 4년 7개월 전이었다. 채준헌 사장이라고 하면 2003년부터 2005년까지 경제신문에 단골로 등장하던 삼십대 초반의 젊은 기업인으로 그의 어머니인 고영자 사장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KK제과의 CEO가 된 후로 강철심장을 가진 남자라 불릴 만큼 악화된 KK제과의 경영 상태를 원상복구 시켜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트랜스지방 파동으로 부도설까지 나돌던 회사를 제과업계 4위로 끌어올린 데에는 그의 피나는 노력이 있어왔다. ' 그의 경영 마인드는 기존의 틀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와튼 스쿨 MBA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폭풍 같은 추진력으로 기존 KK제과 경영진들을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대부분 그의 도전은 매출신장으로 이어졌고 더 이상 그가 돌아가신 전 사장의 아들이기 때문에 경영권을 승계 받았다는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스물여덟부터 경영일선에서 그의 어머니를 도와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유한 그였다. ' 그의 능력만큼 유명한 것이 그의 염문설이었다. 여자들이 독신인 그를 가만 놔둘 리 없었다. 그는 일 중독자였지만 명예, 능력, 외모, 돈, 모든 것을 갖춘 남자에게 여자들이 군침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있지도 않은 스캔들이 터진 것도 여러 번이었고 그냥 식사만 해도 결혼설이 나돌았던 그였다. ' 몇 번만 사적으로 만나거나 좋아하는 눈치라도 보이면 마치 도끼도 들기 전에 나무가 먼저 부러지듯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여자들이 부지기수였다. 미국의 상업주의와 현실주의가 교묘히 어우러진 그의 가치관은 한국여성들과는 맞지 않아보였다. 그저 힘들 때 약간의 위로가 필요해 만났을 뿐인데, 자신이 부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도 준헌은 영 이해하기 힘들었다. 구속당한다는 것, 소유 당한다는 것, 누구에게 속한다는 것, 그에게는 끔찍한 일일 뿐이었다. '“준헌 씨, 왜 전화를 안 받아요?”'“내가 너에게 못할 짓이라도 했나?”'“저는 당신을 원해요.”'“너와 내가 가볍게 데이트했던 게 너한테는 몹쓸 상상을 불어넣었나보군.”' 나중에 발목이라도 잡힐까봐 교묘하게 잠자리를 피하는 그를 여자들은 더욱 몸달아했다. 얼음마왕이라는 그의 별명이 그의 성격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 효은이 가까이서 본 그는 위압적인 남성 우월주의자였다. 몸에 밴 교양과 매너는 규범에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대부분 형식이고 예의였다. 그가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의 오랜 친구인 상현과 몇몇 친구들, 여동생 연진에게만 진심을 보일 뿐 나머지 사람에게는 그저 가식일 뿐이었다. 돌아가신 전 사장인 고영자 여사가 누누이 강조한 부분이었다. '낯선 사람을 믿지 마라. '' 연진이 데려온 효은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을 효은은 잊을 수 없었다. 효은은 냉담과 경멸을 밑바닥에 가득 담고 그녀를 꿰뚫듯 바라보는 그의 강한 눈빛에 소름이 돋았었다. 그의 그런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은 것은 2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함께 했던 양주댁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더 이상은 가정부로 있지 못하게 되었다. 연진은 유능한 도우미 아줌마들을 고용했었으나, 준헌은 뭐가 못마땅한지 갖은 꼬투리를 잡아 그들을 그만두게 했다. 이유는 그때그때 달랐다. 음식에 조미료를 너무 많이 넣어서, 청소가 깔끔히 돼있지 않아서, 인상이 마음에 안 들어서 등등이었다. 오빠와의 힘겨운 전쟁에 효은을 끌어들인 연진은 결국 효은을 가정부로 고용하는 데 성공하고 깊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연진과 효은,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건 5년 전, 어느 날 밤이었다.''' * * *'' 효은은 5년 전 막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어린 남동생을 안고 집을 뛰쳐나왔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취직 할 때까지만 참자고 생각했으나,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현실이 있었다. 자신의 신변을 위협받게 된 효은은 동생과 함께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양아버지가 쫓아올까봐 친척 집에도, 친구네에도 갈 수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정부 일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감사해야 했다.' 효은의 어머니는 효은이 어릴 적 재혼을 했었다. 식당일을 하던 효은의 어머니는 외로움에 자주 찾던 손님과 연분을 맺으셨지만 효은의 의붓아버지가 된 오섭은 술만 마시면 효은의 어머니를 두들겨 패는 사람이었다. 효은의 어머니는 뒤늦게 그의 나쁜 버릇을 알고 후회해 봤지만 이미 뱃속에는 그와의 아이가 자라나고 있었다. 술만 마시던 오섭은 도박까지 손을 대 결국은 효은 어머니의 작은 식당까지 넘어가고 말았다. ' 남자 하나 잘못 만나 신세를 망친 효은의 어머니였지만, 어떻게든 효은과 늦게 태어난 아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폭력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던 효은의 엄마는 췌장암으로 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오섭의 학대는 고스란히 효은 남매의 몫으로 돌아왔다. '‘철썩!’' 효은의 하얀 뺨 위에 오섭의 두툼한 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귀가 멍멍해지도록 맞는 날이 계속되자 효은의 뺨은 매일 부어있다시피 했다.'“누나!”'“네 엄마 돈 숨겨놓은 거 내놔!”'“그런 것 없어요. 아버지. 돈이란 돈은 다 가져가셨잖아요?”'“그래도 조금의 유산이라도 남겨줬을 것 아냐? 이 계집애가!”' 양아버지는 자신이 발로 걷어차 중심을 잃고 벽에 부딪쳐 쓰러져 있는 효은의 머리채를 쥐곤 씨근덕대고 있었다. 그의 더운 호흡가득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효은은 눈을 감았다. 효은의 등과 옆구리가 으스러지듯 아파왔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고통을 참아낼 뿐이었다. 그것밖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진우는 작은 몸으로 오섭을 말렸지만 오히려 그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다리를 잡고 매달려있는 진우를 걷어차며 자신의 아들에게 욕을 해댔다.'“이딴 새끼 왜 태어나가지고 귀찮게 구는 거야?”'‘철썩!’'“진우야!”' 결국 진우에게 손찌검까지 하게 된 끔찍한 상황에 효은은 자신의 몸으로 동생을 힘껏 감싸 안았다.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 건지, 효은은 진우를 안고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곧 이어질 폭력에 최대한 등만을 노출시키려는 그녀의 안타까운 노력이었다. 진우를 안은 효은의 몸 위에 오섭의 가죽 벨트가 강하게 내리쳐졌다. 그녀의 가녀린 몸에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벨트가 살을 파고들 듯 짜악 소리를 내며 날카롭고 처절한 소리를 냈다. ' 진우의 울음소리와 자신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계속되는 양아버지의 벨트 소리가 방안가득 울려 퍼졌다. 진우는 공포에 질려 효은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진우의 몸이 덜덜 떨리는 듯 해 아픈 중에도 효은은 진우를 더욱 끌어당겼다. 효은은 이를 악물며 다짐하고 있었다. 이대로 살지 않겠다고.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고 온 몸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아도 어린 동생과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를 보며 지금을 참아내기로 했다. '그 소동은 옆집에서 경찰에 신고를 하고 경찰이 들이닥칠 때까지 계속되었다.'“뭐요? 당신들…….”'오섭이 경찰을 보며 기분이 나쁜 듯 먼저 물었다.'“주민들이 신고가 들어와서요.”'“내 새끼들 내가 패는데 경찰이 무슨 상관이요?”'“이 아저씨 정말 못 말리겠구먼. 이봐요. 아동학대죄로 잡혀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애들 좀 그만 때리쇼.”' 경찰은 오섭에게 몇 마디 주의를 주고는 돌아가 버렸다. 경찰이 가고 난 후 양아버지는 혼자 갖은 욕을 해대더니 기운이 빠졌는지 곯아떨어져서는 효은이 학교를 갈 때도 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