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스키장에 놀러 와 있는 수정은 오늘을 디데이로 잡았다. 태석을 만날수록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는 이 일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미 전성기의 분위기는 지나가긴 했지만 2월 중순의 스키장은 나름 사람들도 많고 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며 즐기려는 사람들로 많이 붐볐다. 수정은 미국에 있을 때는 겨울이 되면 휴가 기간을 스키장에서 지냈던 덕분에 스키나 스노보드를 즐기는 실력은 제법 수준급이었다.'“크리스 어때? 여기 말이야. 당신을 꼭 데려오고 싶었어.”'“좋네요.”'“일에만 너무 파묻혀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더라고. 그래서 널 일과에서 납치하고 싶더라.”'태석은 그렇게 말하며 수정의 손을 잡았다.'“스키나 스노보드 탈 수 있어?”'“왜요? 나 잘 못 타면 강습해 줄 거예요?”'“당근이지. 날 믿어.”'태석의 자신만만한 소리에 수정은 큰소리로 웃었다.'“왜 웃는 거야?”'“정말 잘 타요? 나한테 교습해 줄 정도로? 그냥 궁금해서.”'태석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거든. 나는 없는 말 꾸며내진 않는다고?”'태석의 정색하는 소리에 수정은 양손을 펴고 아래로 내리는 것을 반복하며 그를 진정시켰다.'“알았어요. 알았어. 설마 저렇게 어린애 같은 반응을 보일 줄이야?”'“뭐야? 당신, 날 우습게 보는 거지? 곧 나의 실력을 보여주겠어.”'둘은 성주 리조트 안으로 들어갔다. 태석이 미리 연락을 해서 그런지 제법 전망이 좋은 객실을 프런트에서 마련해 주었다.'“와우. 여기 경치 정말 좋은데요?”'“그렇지? 여기는 가끔 우리 가족들이 스키장 놀러 오면 애용하는 객실이야. 참, 여기.”'그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쇼핑백을 내밀었다.'“이건 뭐예요?”'“이거? 보드복. 내가 갑자기 끌고 와서 아무런 준비 없이 왔을 것 같아서 너 만나기 전에 백화점에 들러 보드복을 샀어. 선물이야.”'“내가 이거 받아도 되나요?”'“물론. 여기에 내가 보드도 샀어.”'“뭐라고요?”'“음. 네가 고가의 물건이라고 안 받을 거란 생각도 했지만 우리 앞으로도 여기 자주 올 거니까 이번 기회에 장만하면 좋을 것 같아 내가 샀어. 음. 중급으로 해서 올라운드 테크로 하나 구했으니까 실컷 산등성이를 구르며 타 봐.”'수정은 태석의 말에 한숨을 쉬면서 보드를 받아 들었다. 정말 태석을 만날 때마다 느끼지만 언니의 일기장에 묘사되어 있는 인물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떤 것이 그의 진정한 모습일까? 날이 갈수록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수정은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크리스는 침대가 있는 방을 사용하도록 해. 난 맞은편 온돌방을 사용할 테니까.”'“괜찮아요.”'“아냐. 너 미국에서 계속 살아서 침대 없으면 불편하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해.”'태석은 수정의 등을 떠밀어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여보냈다. 객실의 크기는 일반 아파트 50평대에 해당하는 크기로 하룻밤 묵을 예정으로 오긴 했지만 둘이 사용하기에는 아주 크고 호화로웠다. 잠시 후 방에서 보드복을 갈아입고 나온 수정은 큰 키에 모델 같은 포스를 풍기며 스포츠 의류 화보에서 빠져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고는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휘이, 와우. 멋있는데.”'그의 훑어보는 눈초리에 갑자기 부끄러워진 수정은 얼굴이 붉어졌다.'“그만 하고 우리 스키장으로 나가요.”'태석은 다가와 수정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더니 자신과 수정의 보드를 들고 먼저 객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가는 수정은 태석의 잘 빠진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 어디서 탈래? 여기서 연습하고 초급자 코스에서 내려올래?”'태석의 말에 정신이 든 수정은 고개를 흔들었다.'“왜?”'“나, 조금 탈 줄 아니까 강습 안 해줘도 돼요. 그러니 우리 코스에서 누가 먼저 내려오는지 내기할래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중급자 코스에 오르는 리프트에 줄을 섰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태석도 그녀 뒤를 따라 같이 줄을 섰다.'“잠시만, 그럼 지금까지 날 놀린 거야? 탈 줄 안단 말이지?”'“조금,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만.”'조금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수정을 보고 태석은 귀여운 마음이 들어 그녀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태석 본인은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점점 그녀에게 빠져드는 그는 조만간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할 예정이었다. 정상에서 내린 그들은 보드를 타고 경사도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태석은 조금 탈 줄 안다던 그녀가 제법 능숙하게 타는 모습을 보고는 속았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슬로프를 다 내려왔을 때 태석은 수정에게 투덜거렸다.'“뭐야? 잘 타잖아? 난 정말 초보인 줄 알았네.”'“후후후, 우리 내기해요. 누가 먼저 내려오나? 상급자 코스에서 어때요?”'태석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하는 수정에게 못 당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그렇게 오후 시간을 스노보드 타기를 즐기고는 리조트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객실로 올라왔다.'“아우. 피곤해. 오랜만에 탔더니…….”'태석은 말없이 욕실로 들어가서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놓고 나와 수정에게 이야기했다.'“들어가서 목욕해. 안 하면 내일 근육통 때문에 고생할 거야. 따뜻한 물을 받아 놨어.”'수정은 태석의 따뜻한 태도에 자꾸 흔들리는 것 같아 욕실로 들어가면서도 마음을 다잡았다. 납골당에 있던 언니의 사진을 떠올리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한편 태석은 수정이 욕실에서 씻는다고 생각하자 자꾸 전라의 수정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거실에 앉아 욕실에 가 있는 수정의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TV를 틀어 뉴스에 집중했다. 뉴스를 보고는 있지만 태석의 정신은 자꾸 욕실로 향했다. 한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가운을 차려입은 수정이 욕실에서 나왔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태석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태석을 느끼고 있는 수정은 저도 모르게 긴장되어 베란다 쪽으로 걸어가 창밖을 내다보며 열심히 수건으로 머리를 닦았다. 잠시 후 등에 쏟아지던 시선이 사라진 느낌에 뒤돌아보니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욕실 문이 닫힌 것으로 보아 씻으러 들어간 듯했다. 긴장감이 아직 가시지 않은 거실에서 소파에 주저앉은 수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욕실에 들어 있던 시간은 꽤 긴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실에 앉아 TV를 응시하고 있던 수정은 많은 시간이 흘러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수정의 옆에 앉았다. 수정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자 물기에 젖은 그의 모습이 수정의 숨을 멈추게 할 정도로 멋있었다.'“샤워했어요?”'“하하하, 밖에 크리스가 기다리고 있단 생각이 들자 빨리 나오고 싶던걸.”'“칫!”'“응, 지금 너 아주 섹시해 보이는 거 알아?”'“설마요?”'그는 고개를 저으며 수정의 말을 부정하고는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와인과 육면체 모양으로 잘라 놓은 고다 치즈를 가지고 왔다.'“이건 뭐예요?”'“너랑 나랑 사귀고 처음 온 여행이잖아. 그래서 축하도 할 겸 와인 한 잔씩 하자고. 이거 네가 미국에서 많이 먹었던 고다 치즈야.”'“그래요? 와인은 뭐예요?”'“이거 샤토 보네 와인.”'“프랑스 와인?”'태석은 수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 잔에 와인을 조금만 따라 수정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주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수정은 맛을 음미하며 고다 치즈를 찍어먹었다.'“이 와인은 약간 떫어요.”'“탄닌 맛이 강해서 그래.”'그는 한참을 수정을 바라보더니 수정의 손에 쥐어진 잔을 내려놓고는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상쾌한 향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게 된 수정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수정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그의 내음을 가슴 가득히 들이마셨다.'“크리스.”'그가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어깨에 기댔던 머리를 들자 그가 수정을 지긋이 응시했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이 살며시 다가왔다. 그는 수정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그녀가 입술을 열자 혀를 입안으로 집어넣어 치열을 더듬으며 입안에서 그녀의 혀를 끌어당겼다. '“으음.”'그가 주는 황홀경에 빠진 수정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자 태석은 더욱 깊숙한 키스를 했다.'“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