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장

“힘들지 않느냐?”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제 걱정은 마시어요.”

행색은 초라하나 애초에는 무척이나 고운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도 그러하거니와 고운 자태와 음색 또한 여염집 아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관군의 손에 이끌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미안하구나! 너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아니어요! 어머니 잘못도 아닌걸요.”

“아버님을…… 원망하느냐?”

어미의 물음에 아이는 도리질을 했다.

“원망이라니, 절대 아니어요. 저는 아버님이 결백하시다는 걸 믿는걸요. 언젠가는 꼭 제가 아버님의 결백을 밝혀드릴 것이어요.”

아직은 철없는 아홉 살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또박또박 제 의견을 말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어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인적이 드문 산길을 걷는 모녀의 발길은 천근만근 무거워 보였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위풍당당하던 세도가의 집이었으나 아비인 민정호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아비는 참수를 당하고 하나 밖에 없는 고명딸과 어미는 관노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의정(領議政)까지 지낸 자의 말로치고는 너무나 어이없고 비참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남겨진 이들이 겪어야하는 일에 비하면 차라리 죽은 자는 편안할 것이었다.

비록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남의 손을 빌어 살았던 정경부인(貞敬夫人)이었지만 그 심성만큼은 이루 말 할 수없이 착하여 아랫것들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은 덕망 있는 부인이었다. 그런 부인이 혼인한지 여러 해가 지나도 태기가 없어 고민하다 인근에 있는 절인 지장사(支壯寺)에 찾아가 날이면 날마다 치성을 드리고 나서야 드디어 태기를 보였다. 당시 남편인 민정호가 태몽을 꾸었는데, 지장사 연못에 예쁘고 탐스러운 연꽃이 피어있더란다. 그 연꽃이 하도 탐스러워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사미승이 나타나 그 꽃을 따 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꾼 뒤, 정경부인(貞敬夫人) 나이 40이 넘어 어렵게 얻은 고명딸이 민수련이었다.

그토록 귀하게 얻어 곱게만 키운지라 버릇이 없을 법도 하건만 수련은 총명하고 예의 바른 모습으로 어느 누구에게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수련의 나이 이제 막 아홉, 가문이 망한 것으로도 모자라 관비의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임에도 아비의 결백을 주장하는 모습이 너무도 당당하여 어미인 정경부인(貞敬夫人)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빨리 걸어!”

두 명의 관군 중 하나가 정경부인을 포박한 포승줄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그 힘에 못 이겨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넘어졌다.

“이것들이 나들이 가는 줄 아나. 오늘 안으로 이 산을 넘어야 한단 말이야. 어서 일어나지 못해!”

관군 중 앞니가 빠져 볼썽사나운 사내가 넘어진 정경부인을 내려다보며 불만을 얘기했다. 그러자 눈이 쪽 째져 기분 나쁘게 생긴 동료 하나가 넘어져 있는 정경부인의 몸을 위 아래로 훑어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정경부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추렸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그러자 째진 눈을 한 사내가 이 빠진 사내를 보며 숙덕였다.

“이보게, 달수! 어차피 관노로 가면 이놈 저놈 올라탈 배 아닌가. 그 전에 우리도 맛 좀 보세나! 계집년 얼굴도 반반한데 다른 놈들만 좋은 일 시킬 게 뭐란 말인가? 우리가 먼저 맛 좀 본다고 티가 나는 것도 아니고 하니, 어떠한가?”

“그래도 대갓집 안방마님 아니었나! 어찌…….”

“어허! 이 답답한 친구를 좀 보게. 그러니 하는 말아닌가! 우리가 언제 대갓집 안방마님 배를 타보겠나? 아니 그런가?”

“그래도 이건 좀…….”

달수라는 사내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정 그렇다면 자네는 여기서 조것이나 데리고 있게나.”

이들의 말에 사색이 된 정경부인은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네 이놈들! 내 아무리 몰락한 가문의 아낙이긴 하나 그래도 사대부가의 여인이다! 감히 네깟 놈들의 주둥이에 그렇게 함부로 오르내릴!”

짝!

앙칼지게 대꾸하던 정경부인의 얼굴 위로 무지막지한 손찌검이 날아들었다.

“닥쳐! 잠깐이면 되는데 웬 지랄이야! 잔소리 말고 따라와!”

정경부인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사내는 그 길로 질질 숲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악! 놓아라, 이놈들! 당장 놓지 못할까!”

정경부인은 온몸을 비틀며 저항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어마어마한 발길질을 부를 뿐이었다.

퍽퍽.

인정사정없이 이어지던 발길질을 멈춘 사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제아무리 여기서 소리쳐 봐야 듣는 사람 하나 없어! 설령 듣는 놈이 있다 해도 관노인 네 주제를 알면 그놈도 덤빌 테니, 그런 일을 바라는 게 아니라면 그 입 좀 다무시지!”

“제발, 이러지 마시오! 내 잘못했으니 이러지 마시오! 다른 부탁이라면 내 얼마든지 들어줄 터이니 제발, 이러지만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