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오늘 좀 멀리가자.”'“어딜?”'다짜고짜 문을 열자마자 이야기하는 것이 생뚱맞아서 지선은 한참 만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웬일인지 하얀색 남방에 넥타이까지 매고 반코트까지 챙겨 입은 모습이 낯설다. 대신 화사하게 웃는 입꼬리 끝의 덧니는 아무리 차려입어도 은석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추운데 어딜 가. 너 바쁘지 않아? 복지원에서 뭐 행사 많을 거 아니야. 산타 분장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니?”'“다 취소했어. 나 일생일대의 큰 일이 있다고 하니까 다들 가라던데 뭐.”'지선은 맑고 화사한 그의 미소가 맘에 들었다. 오늘따라 아주 미소가 극에 달한 듯했다.'“그럼 여기 오는 것도 취소해야지. 뭐할라고? 난 어제 너무 힘들어서 오늘은 그냥 방에서 티비나 볼 거니까 나중에 무슨 일 있었는지 이야기해줘 봐.”'지선의 말투에 금방 뾰로통한 얼굴로 바뀌는 거 보면 은석도 감정을 잘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본인은 177이라고 우기지만 175조금 넘는 그는 그래도 말라서 그런지 그가 우기는 만큼 모두들 믿을만했다. 하얀 얼굴, 완전히 뻗은 직모는 늘 일정한 길이로 잘라서 이마 위를 가지런히 덮고 있었고 해사한 미소는 복지원에서 단연인기 만점이었다.'“누나랑 나가려고 다 캔슬한 거라니깐. 왜 이렇게 작가선생님이 버퍼링이 늦을까.”'“나랑 어딜 가려고……. 나 나가는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지선은 정색을 했다.'“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라구!”'“그래서……. 난 그런 거하고 상관없어. 내 나이에 무슨 크리스마스……. 그리고 그렇다고 어디 나갈 처지나 되니. 괜히 밟혀죽을라.”'그놈의 크리스마스……. 은석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도 안 했지만 한 번도 그녀에게 아름다운 크리스마스라는 게 존재했었을까? 크리스마스에 행복했던 적이 있었을까?'“누나 기분 따윈 상관없어. 오늘은 나를 위해 희생 좀 해!”'30살의 크리스마스라……. 투정을 부리는 듯한 은석의 얼굴을 보면 한 번쯤 그러마 하고 말하고도 싶었지만 정말 그녀에게 있어서 크리스마스는 악몽과도 같은 시간들뿐이었다. '“정말로 힘들어서 그래. 이래서 어딜 간다고. 대체 어딜 가고 싶은데. 내일모레 가면 안 돼? 꼭 나랑 가야 되는 일이야?”'“꼭 오늘이어야 해.”'은석이 지선이 늘 앉아서 밥도 먹고 글도 쓰는 식탁 겸 책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의자를 끌어와 맞은편에 앉으면서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예상했는지 반코트를 벗어서 의자 뒷받침에 걸어놓았다.'“내 인생에 중요한 날이야.”'얼굴을 가까이 마주 대니 은석의 얼굴에 이상한 광채가 나고 있는 듯했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기는 있는 듯해 보였다. 그녀는 마시던 커피 잔을 말아 쥐고 있었다.'“더 줄까.”'곧 그녀의 손에서 커피 잔을 뺏어 싱크대 위에 있는 커피를 마저 따르던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말해봐. 들어줄게. 들어만 줄 테니 제발 나보고 어디 가자고 하지 말아.”'지선의 얼굴에 든 괴로움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석이 말했다.'“우리 집에 가려고. 누나랑.”'“내가 거길 왜 가. 휴가면 집에서 같이 보내는 게 맞잖아. 잘 다녀와.”'그의 표정은 안쓰러울 만큼 일그러졌다.'“누가 그렇게 이해가 안 가?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가자고. 집에 말씀 드릴 거란 말이야.”'“뭐?”'지선은 하마터면 손에 든 커피를 쏟을 뻔했다.'“무슨 소리야……. 뭘 말씀드려.”'“이제 누나와 내 사이를 집에 말할 거라고. 그 정도면 알아들어야지. 누나랑…… 아니 이제 누나라고 안 부르겠어. 지선이랑 결혼하고 싶어. 그래서 말씀드리러 가자고. 에잇, 제길……. 정말 멋있게 프러포즈하려고 준비도 다했는데.”'그의 속상한 표정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무슨 헛소리야. 프러포즈라니. 야, 하은석! 정신 차려. 무슨…….”'지선의 얼굴에 푸르뎅뎅한 노기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은석은 잠시 망설였다.'“왜……. 난, 나 따위는 자격이 없는 거야?”'은석이 화내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지선은 앞에 앉은 남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얘가 왜 이러는 걸까.'“하은석……. 그걸 말이라고 해? 너 지금 나 비웃는 거니?”'지선이 천천히 말했다. 프러포즈라니. 프러포즈라니…….'그녀의 아무런 감정도 없는 말을 듣고서야 은석은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을 했다.'“처음부터……. 누나는 달랐어. 지금도 쭉 그래. 내가 평생 옆에서 돌봐주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연인보다는 엄마에 가까운…….'“은석아. 넌 아직 어려. 그리고 너무 마음이 착해서 그래. 사람 사이에는 동정으로 안 되는 것도 많아. 날 그렇게 동정하지 않아도 돼. 네가 곁에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거란 생각하지 마. 나도 이제는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냥 그건 네 생각만으로 끝내.”'“누나는 내가 싫은가?”'은석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저런 표정이 싫다. 그냥 항상 그렇듯이 나에게 용기를 주고 나에게 기쁨을 주고 그 스스로도 밝게 빛나는 그냥 그런 은석 이었으면 좋겠다.'“내 주제에 어떻게 널 싫어하겠어. 그렇지만 네가 말하는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왜 너의 그 총총한 미래를 나 같은 것한테 쓰려고 하니……. 내가 그렇게 불쌍해?”'그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는 뭔가 감정이 가득한 듯했지만 서서히 시간이 흐르고…… 그는 본래대로 그의 얼굴로 돌아갔다. 제발 그의 마음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길…….'“내가 누나를 처음 보던 날. 그때 느꼈던 감정…… 그런 거 알아? 마음 한구석에서 쩡…… 하고 깨어지는 것 같은 마음을. 누나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해주고 있는 줄 알아? 얼마나 내 마음을 지탱하게 하고 얼마나 내 삶을 기쁘게 하고 얼마나 날 숨 쉬게 하는지…… 아느냐고. 알면 아마 그렇게 차갑게 만은 대답 못할 텐데.”'그의 고백이 지선을 또다시 저쪽 생에서의 아픔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제는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겠다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제발 나를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마라. 네가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이혼녀에 나이도 많은…… 이런 나를…….”'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왜 아픈지 그녀는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아픔은 심해져만 갔다.'“누나…… 괜찮아?”'“아니. 안 괜찮아. 이제 제발 그런 말 말자. 날 더 이상 비참하게 여기고 싶지 않아.”'은석은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그래? 그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어때……. 겨우 전문대밖에 못나왔고 이 나이 되도록 적금통장 하나 없고 월급도 쥐꼬리만 하고 아픈 엄마도 있고. 예쁜데다 직업도 든든하고 전남편이 남겨준 재산도 많은 이혼녀 하나 물려고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되잖아. 서로 해될 것이 뭐있어?”'그의 입에서는 전혀 그답지 않은 말이 술술 나왔다. 돈 많은 이혼녀라……. 아 그건 나였군.'“나도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아. 크리스마스 선물 받고 싶어. 멋진 옷도 사고 pmp도 사고 싶고……. 받기만 하는 게 싫었다면서. 저녁도 누나가 사. 나중에 혹시 상태가 좋아져서 나 같은 거 차이더라도…… 그때까지만 내 여자가 돼 줘. 진심이야.”'“은석아. 제발…….”'그가 그녀를 보면서 맑게 웃었는데 그 웃음꼬리 끝에는 눈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누나 외출 준비할 거지? 우리 서울로 가자. 가서 백화점에 가서 선물도 사고, 옷도 좀 사고. 그리고 맛난 것도 먹자. 그다음에 우리 집에 가자고.” ' '''# 2. 크리스마스(2)''' 무슨 컬렉션같이 일렬로 죽 걸려 있는 가지각색의 비단 띠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 골라든 그는 무심하게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늘 하던 일인데 웬일인지 넥타이 매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투박해 보인다고나 할까. 그는 넥타이 매듭을 다시 풀어서 다시 매기 시작했다. '“그 색깔은 오늘 안 어울려.”'나른한 목소리가 들리고 멈칫한 손을 뒤로하고 하얀색 프렌치 네일아트가 된 윤기 가득한 손톱이 넥타이들 위로 죽 끌어가더니 짙은 푸른색에 가운데 아주 가늘게 s자 모양의 큐빅 장식이 든 것을 뽑아냈다. '“이게 좋겠네.”'그녀는 그의 손에 든 넥타이를 빼앗듯이 뽑아내서는 뒤에다 아무렇게나 걸쳐놓고 손에 든 넥타이를 매주기 시작했다.'“별일이군.”'그의 목소리가 냉랭하게 들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영혼이라는 게 없어 보였다. 이제는 화도 내지 않았다. 늘 매너 있었고 어디든지 가서 그 특유의 히스테리도 부리지 않는다. 여전히 조금 먹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전에는 먹는데도 굉장히 까탈스러웠었는데 무엇을 먹어도 심지어 간을 안 하거나 이상한 맛이어도 전혀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했다. 대신 한집 안에 살면서도 절대 그녀의 구역을 넘어오지 않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는 완벽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말로……. 정말로 껍데기랑 사는 게 이런 걸까? 그러나 뭐 껍데기라도 좋다. 절대로 다른 사람들한테 눈을 못 돌리게 만드는 완벽한 이 남자가 내…… 남편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