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1시였다. 봄이라고 해도 여전히 바람이 매서운 3월 중순이었다. 서점으로 가 리모델링한 출입구 쪽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직원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뒤 사무실로 올라간 혁진은 한동안 망설였다. 전화를 해볼까. 아직 말끔해진 건 아니었지만 윤수가 보고 싶었다. 5시쯤 전화를 했더니 윤수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학과 사무실엔 사람이 없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혁진은 학교로 갔다. 여학생 한 명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작년 봄에 수업했던 강사인데 조교 선생님 좀 만나러 왔는데요.”

"……아, 잠시만 앉아서 기다리세요.”

여학생은 머뭇거리며 의자를 권했다. 혁진은 윤수의 책상과 마주 놓인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학생이 그녀에게 뭔가를 소곤거렸다. 여자가 혁진 쪽으로 걸어왔다.

“저기, 무슨 일인지 저한테 말씀하세요. 조교님 당분간 못 나오세요.”

“왜요? 조교님한테 무슨 일 있어요?”

혁진은 불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휴가 가셨어요.”

“휴가요? 언제요?”

참으로 이상한 소리였다. 학기 중에 휴가를 가다니.

“그제요.”

“언제 옵니까?”

“그건 잘 몰라요. 말씀 안 하셨어요.”

미심쩍어하면서 윤수에게 다시 전화를 해봤지만 여전히 그녀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민 교수 연구실로 올라갔더니 자료집을 보고 있던 민 교수는 담배부터 하나 꺼내 물었다.

“한 조교 만나러 왔냐?”

“네.”

“한 조교 휴가 갔다.”

“들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학과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있었지. 아주 속 시원한 일이 있었다.”

민 교수는 담배 연기를 후 내뿜었다. 속이 시원하다면서도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한 조교가 미친개한테 컵라면 투척했다. 컵라면 열사 됐어.”

민 교수는 도저히 믿기 힘든 이야기를 짤막하게 들려주었다.

“학과장님이 푹 쉬다 오라고 하셨어. 천천히 생각해 보고 결정하라고. 교수들이 아주 생지랄을 했다. 조교 그만두게 해야 된다고. 자기네도 컵라면 맞을까 봐 무서웠겠지.”

연구실을 나와 잠시 차에 앉아 있던 혁진은 윤수의 집으로 갔다. 한동안 망설이다 비번을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지만 윤수는 집에 없었다. 언제 나갔는지 집에선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윤수의 방 벽에는 지난번 혁진이 해준 볶음밥 사진이 붙어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휴대폰도 꺼놓고. 자정이 가까워도 윤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진철로부터 혁진은 전날 민 교수에게서 듣지 못한 나머지 이야기를 소상하게 전해 들었다.

“학교 안에 소문이 쫙 퍼졌어. 사학과 조교, 교수한테 컵라면 들이붓고 잠수 탔다고. 교수들이 뒤에서 다들 그런대. 컵라면 세례 받을까 봐 어디 무서워서 공모 조교 뽑겠느냐고. 조교 계속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러워서 그만두고 싶지 않겠냐.”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윤수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언니나 어머니한테 간 걸까? 양 교장이 어느 학교에 근무하는지, 사는 곳이 어딘지 혁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윤경이 일하고 있는 백화점 매장 이름조차 들은 기억이 없었다. 학과 사무실에 보관되어 있던 윤수의 이력서엔 가족들의 연락처가 나와 있지 않았다. 스스로 돌아오기 전까진 찾을 길이 없어 보였다. 혁진은 하릴 없이 시간을 보냈다.

“한 조교 만났지? 푹 쉬고 왔는지 얼굴이 좋아졌더라.”

진철로부터 윤수의 소식을 전해 들은 건 잔뜩 흐린 4월 둘째 주 목요일이었다. 윤수와 학교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며 진철은 꽤나 안심한 얼굴이었다. 혁진은 전화를 하지도, 윤수를 만나러 가지도 않았다. 안도감이 찾아오면서 마음속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게 불편했고 그녀를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녀와 대면하는 순간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게 될까 봐 머뭇거려졌다.

참 이상했다. 그녀는 잘못한 게 없었다.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녀를 만나는 게 불편할까. 왜 기분이 나쁠까. 이유는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을 뿐이었다. 작가 강연회 준비와 입고될 도서 목록을 검토하는 동안에도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그녀를 만나기 꺼려지면서도 자꾸만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이런 모순된 감정과 싸우다 보니 저녁 무렵에는 피로감이 극에 달했다. 오후 6시가 되어 오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혁진은 차를 몰고 학교로 갔다.

흐린 하늘을 뚫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인문관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혁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선뜻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지지가 않았다. 가로등이 켜지고 비가 한층 거세졌을 때 윤수가 현관 밖으로 나왔다. 비닐우산을 쓴 그녀는 바삐 걸음을 옮겨 놓았다. 혁진은 윤수 앞으로 차를 몰고 갔다.

“타요.”

“언제 오셨어요?”

어제 만났던 사람들처럼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주고받았다.

“좀 전에요.”

우산을 접어 탈탈 물기를 턴 윤수가 차에 올랐다.

“제가 저녁 사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