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가 왔다. 날씨는 차갑고 무거웠다. 교문 앞으로 차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서 있었다.

어렵사리 교문 안으로 진입하고 보니 도로 한쪽에 자동차 두 대가 비상들을 켠 채 서 있었다. 한 대는 파란색 외제 차였고 다른 한 대는 하얀색 국산 세단이었다.

남색 장우산을 쓴 남자와 분홍색 접이식 우산을 쓴 여자가 차를 살펴보고 있었다. 접촉 사고인 듯했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여자 한 명이 시계를 보고 서 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는 듯했다. 남자가 여자의 비닐우산을 신경질적으로 툭 쳐냈다. 여자의 회색 트렌치코트 한쪽이 비에 젖어 있었다.

혁진은 1층 학과 사무실에서 출석부만 받아 들고 4층으로 올라갔다. 크지 않은 전공 강의실은 이미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정각 9시였다.

“민한기 교수님 사고당하신 거 다들 알고 있죠? 남은 수업은 저랑 하게 될 겁니다.”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팀플 따윈 없다, 무조건 개별 과제와 시험으로 학점을 낼 것이다, 지각은 결석으로 처리할 테니 늦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 있는데 지각생 두 명이 수선스럽게 강의실로 들어왔다.

“지각할 것 같으면 아예 들어오지 마세요. 출입문도 하나밖에 없는데 늦게 들어오면 어쩌자는 겁니까? 시끄럽게 들어와서 수업 흐름 끊는 것도 민폡니다.”

학생들이 입을 딱 다물었다.

75분간의 수업은 에누리 없이 진행되었다. 다음 시간에 쓸 자료를 복사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데 진철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업 마쳤지? 3층 외래 교수 휴게실 앞으로 와라. 커피나 한잔하게.

3층으로 내려가니 진철은 이미 커피 두 잔을 뽑아 들고 서 있었다.

“조교랑 인사는 했냐?”

여섯 학번 위 선배인 차진철은 일명 ‘빽도’라 불리는, 사학과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소싯적 그가 학회장이었을 때 수준 미달의 강의로 학생들을 열 받게 하던 학과 교수 한 명을 교양 전담 교수로 밀어낸 사건은 지금까지도 유명했다. 불의를 보면 빽 돈다고 해서 붙여진 ‘빽도’라는 별명답게 그는 지금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출석부만 받아 왔습니다.”

혁진은 진철이 내미는 연갈색 믹스 커피 한 잔을 받아 들었다.

“그래? 한 조교도 골치 아프게 됐다. 이은미가 인수인계도 안 해주고 가는 바람에 맨땅에 헤딩하고 있나 보던데.”

“이은미 조교는 왜 갑자기 그만뒀습니까? 지난 주 통화할 땐 그런 말 안 하던데요.”

교통사고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 민한기 교수로부터 갑작스럽게 수업을 부탁받은 지 이틀 뒤 혁진에게 전화를 해 정식으로 수업을 의뢰하고 준비해야 할 서류들을 알려 준 건 이은미였다.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나긋나긋하게 제출할 서류와 강의 시간을 두 번 세 번 알려 주더니 며칠 새 갑자기 조교가 바뀐 것 같았다.

“말도 마라. 학과가 아주 발칵 뒤집혔었다.”

“왜요?”

“이은미가 올해로 3년째였거든. 학과 내규대로라면 2월에 신임 조교를 뽑았어야 했는데 적임자가 없다면서 그대로 연임했잖아.”

진철은 조교 임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다소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과의 터줏대감인 강현상 교수가 국립대 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타 지역 대학에 교환 교수로 가 있는 동안 학과장인 윤종현 교수와 몇몇 교수들이 이은미를 연임하자고 주장했고, 민한기 교수 혼자 반대하는 가운데 슬그머니 연임으로 가닥이 잡혔다는 것이었다.

“내규까지 어겨 가면서 왜 이은미를 연임시키려고 한 겁니까?”

“알고 봤더니 은미 걔가 지난 가을 종합 시험 봤던 박사 과정 사람 둘이랑 짜고 시험 과목을 편법으로 정해서 올렸다나 봐. 그 인간들 합격시키려고.”

종합 시험은 세부 전공에 따라 개인별로 과목을 정해서 응시하게 되어 있었다. 석, 박사 과정을 민한기 교수의 모교인 타 대학에서 수학한 혁진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지난 가을부터는 서점에 매달리느라 민 교수와 진철조차 만나지 못하는 바람에 학과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학과장이 시켰겠지. 윤 교수가 두 사람 지도 교수였거든. 협조한 대가로 이은미한테 1년 더 조교 자리 보장해 주려고 한 거 아니겠냐.”

끈적한 시선으로 여학생들을 훑어보던 윤종현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하여간에 강 교수님이 돌아와 보니까 그 꼴이 되어 있었던 거지. 밀어붙여서 공개 모집으로 뽑았잖아.”

수십 년 동안 학과 출신을 조교로 임용하던 관행이 비로소 깨진 듯했다.

“학부는 서경대 사회학과 나왔고 거기 사학과에서 석사까지 했대. 역사문제연구소에도 잠시 있었다나 봐. 모교가 아니라서 더러운 꼴 많이 당할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자긴 상관없다고 하더라. 국립대라서 월급도 많고 출퇴근 시간도 정확해서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말이야. 나이에 비해서 사람이 찬찬하고 조용해.”

아침에 본 조교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했으나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복사를 해와야겠다는 생각에 과 사무실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혁진은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