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연 어스름이 천창으로 스며들었다. 설핏 다시 잠이 들었다가 그가 지선을 가만히 눕혀놓고 일어나는 기척에 잠이 달아났다. 그는 다락방 방바닥의 입구를 열더니 찻잔을 챙겨서 소리를 죽이며 아래로 내려갔다. 끼그덕 거리는 발자국소리가 조심스러웠지만 지선은 그 소리를 듣고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과 쿠션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서 한쪽에 잘 개서 쌓아 놓고는 가방을 꺼내 휴대폰의 시계를 보니 네 시 40분이 넘어있었다. 잠든 것은 불과 두세 시간밖에 된 것 같지 않았지만 조금도 피곤하지는 않았다. 적당한 온기를 지닌 바닥은 따뜻했지만 열어진 입구에서는 냉기가 들어오는 듯했다. 화장 가방을 꺼내서 얼굴을 보니 화장도 지우지 않고 눈물도 흘려서인지 얼굴은 영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 상태로 그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 한 10분쯤 흘렀을까 그가 올라오는 소리가 나자 지선은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얼굴도 얼굴이려니와 새벽의 그 입맞춤이 다시 떠오르자 무안해진 그녀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는데 방바닥에서 쑥 그의 상체가 들어왔다.'“벌써 일어나버렸군. 조용히 내려온다고 온 건데……. 기왕 일어났으면 여기서 씻고서 가면 옷만 갈아입고 출근하면 될 것 같은데 밑에 욕실에 온수 틀어놨으니까 조심해서 내려와.”'그의 목소리가 주는 온기와 배려가 그녀의 맘에 깔린 부담스러움 등을 조금 내려놔 주는 듯 했다. 지선이 그 밑바닥 입구로 내려서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지선이 부담스럽지 않게 하려고 배려하는 듯했다.그녀를 내려주고는 그는 방을 정리하기 위해서인지 다락방으로 다시 올라갔다. 지선은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아래층 부엌 옆의 욕실로 들어갔다. 온기가 가득한 욕실의 세면대 옆에는 잘 마른 수건 하나와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칫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 문단속을 하는 그의 뒷모습 너머로 뿌옇게 밝아오는 아침이 보였다. 그와 벌써 두 번째 맞는 아침이었다. 무엇인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외간 남자와 두 번이나 같이 밤을 보낸다는 것은 그녀의 이성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미 이렇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문을 걸고 보안장치를 켜고 차와 지선이 서있는 쪽으로 왔다. 확실히 전에 보다 많이 야윈 모습이었으나 그의 눈은 굉장히 따스해 보였다.'“차 문이 열기 난해하지.”'그는 차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태운 뒤에 운전석에 앉고 곧 시동을 켰다. 그의 차는 묵직한 굉음을 내며 밤새 생긴 물웅덩이들을 피해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잔 것도 아닌데 피곤하겠군. 오늘이 평일이란 걸 생각 못하고 있었어. 내가 쉬니까 다른 사람도 그런 줄 알고…….”'그가 물웅덩이들을 피하면서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아침의 뿌연 여명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이제야 사실인 듯 느껴졌다. 어쩌면 아침에 일어나 햇살을 받으면 사라져 버리는 물거품이나 이슬방울처럼 그의 꿈결 같은 목소리나 그의 마음이 에어지는 듯한 마음이나 혹은 발끝까지 찌릿했던 그의 입맞춤 등이 그동안 그녀가 바라왔던 간절한 갈증을 꿈속에서 한 방울의 독약처럼 풀어 헤쳐 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그가 놓아준 칫솔로 이를 닦으면서도 도무지 현실적이지가 못했다. 그러나 밤새 쏟아진 폭우로 생긴 물웅덩이와 작은 흙탕물 폭포들을 피하느라 덜컹거리는 차속의 진동이 그녀를 현실로 데려와 주어서 그녀는 너무나 행복했다. '' 어떤 여자라도 자신이 맘에 들어 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고백을 하면 기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선은 자신의 일생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고 누구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꾼 막연한 꿈속에서의 남자란 이런 백마보다 더 비싼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남자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박성진 처럼 근면 성실하고 약간의 고집이나 땀을 흘리며 먹는 도가니탕이 어울리는 평범한 남자도 감지덕지할 지경이었다. 오빠들이나 그 삼촌처럼 폭력적이거나 아버지처럼 나약해서 구석구석 짐이 쌓인 단칸방을 배경으로 하루하루의 지겨운 삶이 펼쳐지지만 않는다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 곧 덜컹거리는 비포장 길이 끝나고 도로로 나오자 차 안의 소음은 마치 지워진 듯이 사라졌다. 이른 시간이라 도로 위에는 거의 차가 다니지 않았다. 아직 산속의 샛길이기 때문에 비어있는 도로를 그의 차는 굉음을 내면서 쏜살같이 달렸다. 조금 있다가 출근시간이 되면 차가 막힐까봐 그는 차가 없는 빈 길은 빨리 통과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거기가 원래 빈집이라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프겠어. 생각해보니 어제도 퇴근하자마자 나오느라 저녁도 못 먹었을 거 아니야…….”'그가 속도를 더 올리면서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사실 좀 속이 허한 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배고픔 자체를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지 못했다.'' 지선은 얌전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오른 낡은 가방 위에 올려놓고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해가 뜨지는 않았지만 환해진 길 위에는 차들이 드문드문 있었고 서울로 갈수록 차가 늘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갑자기 지선은 따뜻한 손길에 깜짝 놀랐다. 그가 운전대를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덮었기 때문이었다.''“어제 저녁을 굶긴 죄로 앞으로 반년 동안 점심 사면 죄가 용서되겠지? 앞으로 반년은 그냥 백수니까 수영이랑 단둘이 촬영 같은 데 가지 마. 그 녀석 보기보다 바람둥이라…….”''그의 농담 같은 말에 지선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런 우스갯소릴 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그의 마음이 손등을 타고 그녀의 혈관 구석구석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그가 손을 떼더니 갑자기 차를 길로 붙였다. 지선이 보니 편의점 앞이었는데 편의점에는 그 체인점에서 오는 화물차가 앞에 서있었다. 그가 들어가더니 조금 있다가 비닐봉지를 들고 나와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금방 만들어진 듯 따뜻한 샌드위치와 커피 우유 그리고 생수 한 병이 들어있었다.'“김밥은 상하기 쉬워. 여름에는 되도록 만들어놓은 음식 먹지 마.”'지선이 매일 편의점표 김밥 한 줄로 점심을 때우는 걸 들키기라도 한 듯 지선은 속으로 뜨끔한 느낌이었다.'“도심으로 들어가면 길 막힐 것 같아서. 시간이 되면 아침이라도 먹고 가면 좋을 텐데.”'“우현 씨는요.”'지선이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출근하는 사람이나 신경 써야지. 난 괜찮아 되도록 빨리 데려다줄 테니까 대충 먹고 점심은 이따 나랑 맛있는 걸 먹자고. 그리고……. 어제 나와 줘서 고마워.”'그의 말이 손에 들려 있는 따뜻한 캔 커피보다 더욱더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