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한 연기가 옥빛 하늘을 뒤덮었다. 마치 생명을 지닌 듯 살아 꿈틀거리는 불길이 대지를 빈틈없이 사르며 덮쳐 들어왔다. 푸른 녹음과 무지갯빛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들판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렸다. 미소와 사랑이 가득한 화국(花國), 그 꽃의 나라가 혈관을 흐르는 피보다 붉은 불길에 휩싸였다.'시냇물을 담은 듯 맑은 눈동자의 화국의 여인, 아린의 상아빛 뺨에 무섭도록 파고들어오는 불길의 기운이 어른거렸다. 탁! 탁! 타들어가는 황폐화된 조국의 종말을 바라보며 아린은 품 안에 간직한 단도를 꼭 움켜쥐었다.'“아린, 무서워. 판 오라버님도 안 계신데 어찌하면 좋을까!”'공주 헬레나가 공포를 담은 눈으로 외쳤다.'화국의 적통 왕자, 판은 종말을 맞는 이 나라에 없었다. 마음이 닿는 대로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판이 없는 지금, 사국의 공격을 받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러나 판이 있었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판이 왕자라고는 해도 화국 사람들은 무기를 잡지 않았다. 더욱이 평생 꽃만 가꾸어온 판이었다. 어차피 이길 싸움이 아니라면 왕자가 화를 입지 않은 것만도 천행이었다. 지금 대지를 살라먹으며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불길을 바라보며 화국의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두려워도, 판만은 무사하기를…….'“아린, 타칼 님께서는…….”'헬레나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아린을 돌아보았다. 아린의 심장이 짧게 저미듯 끊겼다. 그녀의 아버지, 화국의 역사상 가장 높은 의술과 많은 업적을 남긴 그, 그러나 그의 영혼은 이미 여기 하늘 아래에 없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한 즉시 최전방으로 나가 힘없이 쓰러져 내리는 사람들을 돌보고 상처를 치료했다. 결국 그는 사국의 검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아린이 입술을 꼭 깨물고 힘없이 고개를 흔들자 헬레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미안해. 타칼 님까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아니에요. 어머니 곁으로 가신 거라고…… 믿어요.”'그녀의 어머니는 아린이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다. 아린은 마지막까지 위대한 스승이셨던 아버지가 부디 편안히 어머니를 만나기를 기도했다. 순간 또다시 굉음이 울리며 성벽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아린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떠는 헬레나를 끌어안았다. 부스스, 흙과 모래가 떨어져 내리며 벽이 무너져 내리고 기둥에 금이 갔다.'“아린, 어머니 아버지는 모두 어디에 계시니? 왜 나만 피해 있어야 하니?”'헬레나가 불안에 떨며 외쳤다. 아린은 그녀를 지키듯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그분들은 이미 돌아가셨다. 사국의 군대는 성을 점령하자마자 가장 먼저 왕과 왕비의 목을 쳤다. 아린과 헬레나를 포함한 여자들은 대신들이 천신만고 끝에 뒤로 숨긴 것이다.'전쟁과 멸망의 공포가 둥둥 떠다니는 그곳에서 아린은 무섭도록 냉정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화국에서 약한 것은 죄가 되지 않았다. 화국의 공주 헬레나는 그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칭송받는 여인이었다. 왕도, 왕비도 죽어 버린 지금, 아린은 화국의 사람으로서 공주인 헬레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저들은 남자들만 죽이고 있어요. 여자들은 생포하고 있으니 아마도 노예로 데리고 갈 생각이겠죠. 제 말 잘 들으세요. 이제부터는 제가 헬레나예요.”'헬레나 공주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의지하듯 아린의 품에 안긴 채 공포에 질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린을 올려다보았다. 흔들림이 없는 아린의 눈동자는 곱고 여리기만 하던 지금까지의 그녀와는 틀렸다. 확고한 의지를 담은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아린! 그, 그게 무슨 뜻이니?”'“살아 계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해요. 제가 화국의 공주예요. 만약 제가 처형당하더라도 살아요. 살아남기만 하세요!”'“아린…….”'헬레나의 하얀 손가락이 아린의 옷깃을 잡는 순간 파괴음과 함께 기둥 한 축이 무너져 내렸다.'“꺄아악!”'헬레나가 미친 듯 소리치며 아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린은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안았다.'“정신 차리셔야 해요. 저런 것쯤 앞으로 겪을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몰라요.”'“어, 어떻게…… 사국은 어째서…….”'“시간이 없어요, 공주님!”'아린은 급하게 헬레나의 옷을 벗겨 내렸다. 헬레나의 눈물과 한숨 속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바뀌고 있었다. 아린과 헬레나의 옷이 바뀌는 순간 아린은 헬레나를 뒤섞여 있는 여인의 틈으로 숨겨 앉혔다. 여인들은 모두 숨죽인 채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단호한 눈의 아린이 천천히 고개를 드는 순간 불에 타 떨어져 내리는 기둥 사이로 사국의 군대가 들이닥쳤다.'“망국의 공주를 생포하라!”'강력한 무력으로 화국을 삼켜 버린 나라, 사국의 군대가 들이닥치는 순간 여자들의 비명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그들의 무자비한 힘이 아린의 무릎을 강제로 꿇리며 억압해 왔다.'“사왕 라엘이시어! 망국의 공주입니다!”'한 줄기 섬광과도 같은 날카로운 기운이 아린의 눈동자에 아주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 나라를 빼앗은 이,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은 사국의 왕이 일렁이는 불꽃 사이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말에 올라 탄 남자의 얼굴은 오기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의 혼란 속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주위를 물들이고 있는 붉은 기운만이 눈에 새겨진 듯 선명할 뿐이었다. 핏빛 죽음의 사왕 라엘의 건조한 목소리가 서서히 흘러나왔다.'“망국의 공주는 사국이 거둔다.”'차가운 말을 남긴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화국의 남자와 전혀 다른 기운, 압박해 오는 붉은색을 내뿜는 사국의 왕, 상상보다 훨씬 커다랗고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전쟁의 신, 그 붉은 기운이 한가로운 어떤 성곽에서 바람과 같은 짧은 만남을 가졌던 어떤 남자의 영상과 겹쳐지는 순간 아린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아린은 입술을 꼭 물고서 다시 한 번 품 안 깊숙이 품은 단도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러나 그 손끝은 이미 어쩔 수 없는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