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스산한 바람이 불자 깡말라 볼품없는 소녀가 자신의 몸을 감싸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청아하였고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게 분명 소녀의 눈에 보이건만 왜 자신의 주위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 이다지도 소름 돋게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이리 오너라.”'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녀의 귓가에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소녀는 고개를 돌린다. 감히 얼굴을 들고 쳐다볼 수 없는 분이 말에서 내려서자 소녀는 벌벌 떨며 바닥에 두 무릎과 손바닥을 갖다 대고 고개를 푹 숙인다.'“흠. 네가 박지원의 여식이냐.”'“네. 그러하옵니다.”'“네 아비는 어디에 있느냐?”'“제 아비께옵서 선왕님께 누를 끼쳤습니까?”'아비의 걱정부터 하며 물어오는 작은 체구의 계집을 내려다보며 선왕이 기분 좋게 웃어 보인다.'“허허. 아니니라. 내 긴히 네 아비에게 할 얘기가 있느니라.”'“제 아비께옵서는 뒷산에 오르셨습니다.”'“뒷산? 그곳엔 무엇 하러 갔느냐?”'“제 아비. 선비로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나이다.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오른듯합니다.”'“흠. 내 너에게 시원한 냉수한잔 얻어먹어도 되겠느냐?”'“네. 기다리세요.”'역시…. 박지원의 여식일세. 미모는 볼품없어 보였으나 선왕은 소녀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를 닮아서 박식할 것이다 생각하니 그 또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문제였다. 자신의 아들이 거들떠나 보겠느냔 말이다. 허름하고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지낸다고는 하나 선비의 자식이라서 그런지 누추한 옷에 지저분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그 목소리부터가 달랐다. 다른 여인네들과 달리 높은 목소리가 아닌 차분하면서도 정결한 목소리. 선왕 자신을 아랫것인 양 다루는 듯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여기 있습니다.”'“억양이 특이하구나!”'소녀는 선왕의 말에 약간의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금세 표정을 지운다. 그래, 억양이 다르다.'말끝을 올리지 않고 항상 차분하게 내리는 것에서 위엄함이 느껴졌다.''날이 좋아 아이들과 뒷산에 오르는 내내 박지원에게서 콧노래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 콧노래는 집 앞에 들어서서까지 이어졌으나 말 서너 필과 집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군 위병들을 보자 콧노래가 멈추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자신의 여식인 도담과 선왕의 모습에 박지원이 한달음에 달려갔다.'“헉! 선왕님께서 어인 발걸음을 하셨나이까.”'“오. 박지원. 오랜만일세.”'냉큼 달려와 선왕의 발아래서 고개 숙여 인사하는 박지원을 얼른 일으켜 세우는 선왕이다.'“어허. 이 친구. 왜 이러나. 그동안 잘 지냈는가?”'“잘 지냈습니다. 선왕께서 어이하여 이 누추한 곳까지 납시셨나이까.”'참으로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두 사람이다. 한때는 실과 바늘처럼 늘 함께였던 두 사람.'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박지원은 바로 궁을 나왔다. “저는 속세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습니다.” 간곡하게 붙잡는 선왕을 뒤로한 채 궁을 떠난 박지원은 자신이 사랑하고 사랑해주는 여인과 조촐하게 혼례를 치렀다. 간혹, 박지원의 소식은 전해 들으며 살아왔지만 희끗희끗한 박지원의 머리칼을 보자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 그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