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 고요 속에서 다시 서로를 마주하게 된 문영과…… 익상. '한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가로놓였다. 등을 붙인 흙벽에서 새어드는 냉기가 문영의 살을 뚫지만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광창으로 스며든 어스름한 달빛에 드러난 익상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은은한 검은빛 광채를 내는 가죽점퍼에 검은색 목도리를 두른 날카로운 남자. 쌍꺼풀 없이 크고 긴 눈에 우뚝한 콧날, 그리고 거뭇하게 웃자란 수염이 있는 남자는 문영이 숨소리를 낼 수도, 입술을 뗄 수도 없을 만큼 위협적이고도 강렬하였다. '마치 눈앞의 여자를 한 입에 덥석 물어 삼켜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매섭고도 자극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단단한 지갑(紙甲)으로 가리고 있어도 오르락내리락 들썩이는 젖가슴을 다 드러내 놓고 있는 느낌이 들도록 말이다. 어딘지 익숙한 긴장감! 순간, 목에서부터 이마로 순식간에 열기가 훅 밀려 올라왔다. 비로소 심하게 낯이 익은 사내가 누구인지 문영은 깨달았던 것이다.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가끔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휘젓던 그 얼굴이 분명하였다. 전차에서의 그 사내, 그 넓적다리의 남자가 확연하였다. '꼴깍, 목 뒤로 침만 간신히 넘겼다. 들짐승처럼 번뜩이는 눈, 의미를 헤아릴 수 없도록 묘하게 한쪽 입술 끝을 슬쩍 밀어올린 사내에게 시선을 사로잡힌 문영은 꼼짝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가로놓인 팽팽한 긴장감을 깨트리는 움직임이 있었으니. '사내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눈을 가늘게 뜨고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런 다음, 까딱까딱. 중지와 약지만 까딱거려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였다. 순간 문영은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꿰뚫을 듯 마주한 눈동자에 얽혀버린 시선 탓에 거부할 수가 없었다. 주춤주춤 상체만 숙여 거리를 좁혔다. 그러자 순간, 탓! 어깨 위에서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나더니, 툭! 어둠 바깥으로 나가떨어진 것은 새끼손가락만한 바퀴벌레였다. 반사적으로 문영의 몸이 다시 흙벽으로 되돌아가 붙었다. 그러자,'다시 그가 손가락만 까딱까딱. '그리고는 자신의 이마를 가리킨다 싶더니, 문영이 영문을 몰라 고개만 갸우뚱하는 사이 그녀의 이마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툭! 또 어둠 밖 호롱불 앞에 나가떨어진 것은 엄지 손톱만한 거미였다. '하! 하! 놀랄 틈도 없었다. '세 번째다. 남자가 다시금 손가락만 까딱까딱 조금 더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마가 아니라 발밑을 가리키며 아래를 보라고 하였다. 다음은 정말로 찰나였다. 익상의 목도리가 문영의 싸늘한 목덜미에 감긴다 싶더니, 목도리와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찍!’ 하는 가냘픈 괴성이 들렸고, 툭! 앞의 두 번 보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저만치 광문 가까이로 나가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쥐였다.'하아! 쿵쾅쿵쾅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댄다. 코가 맞닿을 만큼 얼굴을 맞댄 남자의 입술에 걸린 재미있다는 웃음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남자의 가죽재킷이 전하는 차가운 감촉에 오도도 소름이 돋았다. 맞닿은 허벅지와 무릎에서 느껴지는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에 숨이 막혔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문영의 입술을 틀어막고 있던 익상의 손이 조심스럽게 떨어져나갔다. 그리고는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술에 댄 그가 한 말은 딱 한마디였다.'“상부상조.”'마치 자신에게 붙은 그림자처럼 움직인 남자가 소리 없이 광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머리에는 흰 옥양목을 둘둘 감고, 얼굴에는 그가 감아 놓은 검은 목도리를 둘둘 감은 채 눈만 내놓은 문영은 잠시 동안 얼이 나가 조용히 닫힌 광문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광창을 스쳐 지나는 바람소리만 귓가를 윙윙 맴돌았다. 흔들리는 호롱불만이 시야에서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