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깼는데도 몽롱하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눈을 떴지만 무거운 돌이 내리누르는 것 같아 옴짝달싹하지 못하겠는 것이었다. 겨우 겨우 고개를 돌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시계를 보니 벌써 5시30분이 넘어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노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낮잠을 너무 오랫동안 잔 것이었다. 근래 이렇게 낮잠을 잔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서둘러 잠옷을 벗어던지고 연보라색 반팔 면 셔츠를 뒤집어 입고, 의자 위에 걸어둔 청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득 집 안이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형아, 뭐하니? 아직도 텔레비전 보니?”'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입으려던 청바지를 마저 입고 나서 안방에 연결된 화장실로 들어갔다. 입 안이 너무 텁텁해서 가볍게 양치질을 하고 찬물로 세수를 했다. 어깨길이까지 길은 머리를 북북 빗어 내리며, “재형아!” 하고 습관처럼 아이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며 손목에 끼워둔 고무줄로 머리를 묶으면서 밖으로 나왔다. '침대를 지나치던 그녀는 문득 바쁜 발걸음을 멈추었다. 단 몇 초였지만 방금 화장실을 거쳐 나오는 동안 뭔가 눈에 거슬리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녀는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 화장실에 나오자마자 보이는 침대 머리맡 옆에 있던 사이드테이블로 가까이 가 보았다. '이게 뭐지?'테이블 위에는 하얀 메모지로 접은 조그만 학 두 마리가 놓여있었는데 다정스레 부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조, 종이학? '보고도 믿기지 않아 발발 떠는 손으로 만져보기까지 했다. 톡 건드려보니 학 한 마리가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정말이었다. 지금 그녀가 본 것은 종이학이 맞았다. 순간 겨드랑이 사이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재, 재형아…….”'다시 재형을 부르는 미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동시에 바르르 떨렸다. '“혹시 네가 이 학을 접었니?”'재형이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미노는 확인하듯 물었다. '종이학. 그것은 생각할 일이 있거나 뭔가 몰두할 일이 있으면 필립이 즐겨 접던 것이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집 여기저기에서 쉽게 종이학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그럴 때는 조용히만 해주면 아무 일이 없었다. 반면 기계로 접은 듯 반듯하게 접혔던 종이학이 구겨져 쓰레기통 안에서 나동그라져 있을 때는 그의 기분이 매우 안 좋을 때여서 아무리 조심을 해도 그의 계속된 히스테리를 견뎌 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재형은 절대 종이접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만 보면 무서운 아빠가 연상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걸 여기다 접어놓은 거지? 내가 잠자는 동안, 재형이 친구라도 온 건가? '그렇게 바라듯 생각하면서도 엄습해오는 불길함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재형아, 혹시 친구 놀러왔었니? 재형아!”'이제 재형을 부르는 미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그런데도 부름에 답하는 재형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평상시라면 “네.” 아니면 “엄마 왜.” 하는 소리라도 들리련만 어떤 소리도 없는 게 이상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침대방문을 밀어젖히고는 거실로 달음박질쳤다. 고개를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어디에도 재형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오른쪽 시야로 베란다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에 노을이 지는 게 보였다. 그것은 꼭 핏빛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재형아!”'혹시 작은방에 있을까 싶어 째진 목소리로 부르며 바쁜 걸음으로 가던 미노는 또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가 저절로 왼쪽으로 돌아갔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딱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이었는데, 그 위에 아까 본 것보다 더 커다란 종이학이 놓여 있었다. 그것도 아까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것과 마찬가지로 둘이 다정스레 부리를 맞댄 상태로. '여기도 종이학이…….'그것을 본 순간 태엽 빠진 인형처럼 저절로 걸음이 멈추어진 것은 물론이고 심장까지 멈춘 것 같았다. 그때 공기 중에 미세한 파동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뒷머리가 쭈뼛 섰다. 빙글 돌아섰다. 거기에는 재형이, 아니 필립이, 아니, 아니, 필립과 재형이 있었다. '옅은 고동빛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모든 것이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 주변을 맴돌던 공기도 심지어 시간도. 그녀는 비디오 일시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호흡도 멈춘 채 필립을 마주본 그 자세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참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를 보자마자, “아아악!” 하고 소리를 질러야 마땅한데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평하게 한마디 말도 못하고 마주보고 서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도 의아했다.'불현듯 그와 대면하고 있는 지금 이 장면은 사실은 그녀에게 매우 익숙한 장면이란 것을 깨달았다. 악몽을 꿀 때마다 볼 수 있었던 장면이었으니까. '식은땀을 흘리며 꾸었던 꿈의 내용은 한결같았다. 그녀는 재형의 손을 잡고 숨이 턱에 닿도록 뛰고 있었고, 뒤로는 필립이 아주 여유만만하게 걸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와의 사이는 벌어지지 않았다. 벌어지기는커녕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금방이라도 잡힐 것처럼 가까워오고 있었다. 힘껏 달리고 있는데, 입에서 쇳내가 나도록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다가 그녀는 꽈당 넘어지고, 일어나서 보면 그가 바로 뒤에서 재형을 가로채어 번쩍 안아들고 있었다. 재형은 꿈에서도 지금 이 순간처럼 그의 목에 마치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꼭 매달려 그녀에게 뒷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재형은 절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마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재형이 자기 아빠가 너무 좋아 매달려 안겨 있는 줄 알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안다. 재형이 너무 두려워 옴짝달싹 못할 뿐이란 것을. '‘재형아, 재형아!’ '목이 쉬도록 불러도 재형은 그 자세 그대로 그의 목에 꼭 안겨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필립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너도, 이리로 와.’ '미노는 고개를 흔들며 뒷걸음질을 쳤다. '‘안 돼, 절대 안 돼.’ '그러면서도 아까처럼 힘차게 도망칠 수 없었다. 이대로 다시 달리면 자유로울 수 있을 터였지만 재형이를 놔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리로 와.’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좀 더 엄격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미노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자유를 약속하는 뒤를 한번 돌아봤다, 다시 고개를 바로하고 재형을 안고 있는 필립을 봤다. 그러는 사이 필립의 세 번째 목소리가 들린다. '‘이리와, 어서.’ '이게 마지막이란 것을 그녀는 잘 알았다. 세 번째니까. 지금 제 발로 그에게 가면 그는 웃으며 받아줄 것이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큰 벌을 내릴 것이었다. 팔이 부러질지, 다리가 부러질지, 잇몸이 터질지, 그건 모르겠지만 하여간 한 달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맞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어떻게 해, 으으으, 으으윽…….’'그렇게 용을 쓰다보면 항상 꿈은 끝나곤 했다. 그에게서 도망쳐 나온 처음 석 달간은 일주일에 한번은 이런 꿈을 꾸곤 했지만, 요 근래에는 거의 꾸지 않았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악몽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굳어있는 사이 그가 한마디 했다. '“오랜만이야.”'씩 웃는 그의 얼굴 위로 핏빛 노을이 튀듯 번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