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당신이 왜…….”'정신을 잃은 리진은 더듬거리는 채희의 말에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엄마인 은주가 눈앞에 보인 것이 환영이 아니었다. 비슷한 옛 기억이 되살아나려했다. 자신을 껴안고 뒹군 남자가 잊고 있었던 가장 아픈 기억을 사정없이 들쑤셔 놓았다. '“죽지 마요, 죽지 마요.”'언제쯤 그를 구해주러 사람들이 올까. 채희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리진이 잘못될까 무서워 쉽사리 손을 내밀어 도와주지 않았다. '“조금만 참아요! 로비에 구급차 도착했대요!”'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안도감은커녕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가 꽉 껴안아 움직이지 않는 손을 움직여 자신의 어깨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쓰러져 있는 리진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싶었다. 숨은 쉬고 있는 건지, 많이 다치지는 않았는지 유일하게 자유로운 머리를 움직여 확인하려 했으나 보이지 않았다.'‘두근두근’'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흐느낌을 버텨내고 있을 때 오른쪽 가슴에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불안에 흐느끼며 떨려오는 자신의 심장 박동과는 달리 무게 있고 일정한 그 박동 소리는 자신을 껴안고 있는 남자의 것이리라. 살아 있기를 너무 바라서 느껴지는 환청이 아니길 바라며 채희가 리진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채희를 감싸고 있는 사람들이 두 갈래로 쫙 흩어지자 그 틈을 타 구급 대원들이 계단을 내려왔다. 조심스럽게 채희에게서 리진을 떼어내 들것에 그를 올려놓자 대원 중 하나가 채희를 일으키며 물었다.'“괜찮으세요?”'“제발…….”'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이 하얘져 괜찮으냐고 묻는 구급대원에게 어떤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달려온 자영이 숨을 몰아쉬며 구급대원의 손에서 채희를 받아 안았다. 혜진과 자영이 채희를 양쪽에서 부축하며 저릿한 온 몸을 손이 아프도록 주물러 댔다.'“얘는 그냥 놀란 것 같아요. 빨리 리진 씨부터 병원에…….”'알았다고 대답한 구급대원이 나가자 그것을 멍하게 보고 있던 채희가 벌떡 일어났다.'“채희야, 괜찮아?”'뛰어 나가는 구급대원의 뒤를 채희가 뒤쫓았다. 어디로 벗겨진 구두를 찾을 생각도 못하고 맨 발로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뛸 때마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른쪽 가슴에 아직도 리진의 심장이 뛰고 있는 것처럼 쿵쿵대며 울렸다. 좀 더 빨리 달리고 싶었지만 휘청대며 뛰는 와중에 채희의 앞에서 구급차가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그녀를 지나쳐 방송국의 정문을 통과해 사라져갔다.'“제발……!”'그 위험한 순간에 들었던 감정이 안도감이라니. 흐느낌에 일그러진 입술 한쪽이 비뚤어졌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감정 아래 지금껏 보지 않으려고 애써 왔던 것이 단번에 가슴을 꿰뚫어 큰 구멍을 남겨 놓았다. 하얗게 질린 채 달려와 그 불 앞에서 자신을 구해낸 엄마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그건 우연이라 여겼다. '하지만 리진은? 그도 우연이었을까? '채희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자신이 어떤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방송국에 항상 상주하고 있는 기자들이 멍하니 서있는 채희를 발견하곤 몰려들었다. 쉴 새 없이 플래시가 터지고 채희의 뒤를 따라 달려온 혜진과 자영이 그녀의 손을 붙잡으려는 것을 채희가 뿌리쳤다.'그런 그녀의 두 눈에 보인 것은 기자들 사이에서 구급차가 지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여자 아이들이었다. '“채희야!”'“놔!”'만류하는 자영을 뿌리치고 후들거리는 다리 한걸음 한걸음에 힘을 줘 기자들을 밀치며 아이들의 앞에 선 채희의 눈동자에서 불이 튀었다. '‘쫙!’'누군가 말릴 틈도 없이 기자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밀쳐낸 여자아이의 뺨을 올려붙였다. 울먹이던 아이들은 순식간에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채희를 올려다봤다.'“네가 지금 배우에게 무슨 짓을 한 줄 알아!”'순식간에 눈앞이 하얘질 정도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뺨을 맞은 여자아이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울어버렸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이 모두 소진해버린 채희가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을 하곤 우뚝 서 있었다. '여자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때린 채희도 알고 있었다. 그저 이 아이들도 감정이 격해져 얼떨결에 저지른 우발적인 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훤하게 알고 있었는데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라도 자신이 리진을 다치게 한 것이 아니라는 책임을 덮어씌우고 싶었다. 도망 갈 수만 있다면 그의 감정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를 쫓아갔던 것처럼 힘이 빠진 다리로라도 뛸 수 있다면 어디로든 도망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도록 온 몸을 싸매 숨어버리고 싶었다. '쏟아지는 카메라 셔터 세례도, 무엇도 귀에 들어오질 않고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몰려드는 기자들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너 미쳤어? 왜 그래!”'기자들의 성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혜진이 서있는 채희의 몸을 흔들자 바람 부는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흔들리는 몸을 보곤 서둘러 손을 떼어냈다. '“채희야, 괜찮아?”'자영이 차분하게 채희에게 물었다. 그런 자영을 돌아보며 말하는 채희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륵 하고 흘렀다.'“……아니.”'괜찮지 않았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여자애를 때린 손바닥은 너무 아팠고, 그보다 더 아픈 것은 휑하니 뚫린 자신의 마음이었다. 리진의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은주의 마음을 못 본 척 외면하고 한 번 도망을 갔으니 이제는 더 이상 눈을 감고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채희는 깨달았다.'“자영아…… 도망 안 갈래, 이제.”'도망가기엔 이제는 열둘의 어린 한채희가 아니었다. 부서지고 깨져도 두려워하지 않고 리진과 맞닥뜨려야 하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또다시 뒤늦게 후회를 하게 되면 어쩌나, 이런 것들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한채희 씨! 한채희 씨를 감싸다가 리진 씨가 부상을 당했는데 열애설이 사실인가요?”'“말 좀 해주세요. 한채희 씨는 다친 곳이 없습니까?”'배우. 노래할 때와 연기할 때의 눈빛이 똑같은 배우였다, 리진은. 그리고 그와 똑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결국 힘없이 그 자리에 쓰러져서 정신을 잃은 채희에게 도움의 손길보다 가장 먼저 쏟아진 것은 역시 기자들의 카메라였다. 처음으로 이 일에 넌덜머리를 내며 혜진이 자영과 함께 채희를 부축해 힘겹게 사람들의 인파를 헤치며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