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하게 다정하게>

황금머릿결

#1. 기억의 문이 열린다

눈송이 하나가 떨어진다. 그 첫 눈송이가 하얀 도복 위에 외투를 대충 걸쳐 입은 여진의 눈앞을 지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진은 눈앞을 지나가던 눈송이가 떨어지는 모양을 따라 시선을 내리다가 이내 바닥에서 자취를 감춘 눈송이를 아쉬워하며 한동안 고개를 숙였다. 그 바람에 귀 뒤로 넘겼던 긴 머리카락이 얼굴 앞으로 흘러내렸다. 시야가 가려져 여진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귀 뒤로 넘기며 걸었다. 허리께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오늘은 정리를 하지 못하고 도장을 나섰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급하게 묶느라 이미 가늘어져서 불안했던 머리끈이 기어이 끊어지고 말았다.

겨루기 대회를 앞두고 열심히 연습을 하느라 여진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었지만, 긴 머리카락은 깜깜한 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더욱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17세의 여진은 또래 여학생들보다 유독 키가 컸다. 2 센티미터만 더 자라면 170 센티미터가 된다. 그래서 허리께까지 흘러내리는 그 길이가 더욱 길 수밖에 없었다.

긴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모아보았지만 묶어 줄 끈이 없어 다시 등 뒤로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여진이 긴 머리카락을 모았다가 펼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애걔? 한 송이로 끝…?”

여진은 소식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어이없어 했다. 일기예보에서는 오늘 밤부터 눈이 올 거라고 했다. 그러나 여진이 발견한 눈은 방금 전 바닥에서 허무하게 사라진 그 한 송이뿐이었다.

“역시… 일기 예보는 믿을 게 못 돼. 기대한 내가 잘못이야….”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어두운 밤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이 어둡긴 했지만, 워낙 익숙한 길이라 무섭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때는 관장이 운전하는 차량을 이용해 귀가를 했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걸어 다녔다. 어린 동생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이상하게 차에만 올라타면 수다가 떨고 싶어 안달 나는 여자 후배들의 질문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학생이 어두운 밤길을 혼자 다니는 것에 그녀의 엄마인 신혜는 늘 걱정이었다. 운동을 그만두든지, 아님 얌전히 귀가차량을 이용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늘 목 놓아 이야기하지만, 여진은 그런 신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일에 아주 능통했다. 그런 여진이기에 신혜는 저녁식사를 하다가 뉴스를 보며 사건소식을 듣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두 살 많은 쌍둥이 오빠들을 번갈아 내보내 동생을 마중 나가게 했다.

“엄마! 그 기집애가 유단자야. 뭔 걱정이야? 치한이라도 만나면 그 치한을 걱정해야 한다니까?”

귀찮아하며 불평을 해 봤자, 돌아오는 건 등짝을 향한 매서운 손바닥이었다.

이제 곧 고 3의 길에 들어서는 두 오빠들은 고집 센 여동생 때문에 늘 골치 아파했다.

상황이 그렇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여진은 오늘도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강진 오빠 아니면 경진 오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추운 겨울밤에 구시렁대며 자신을 마중 나온 오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둘 중에 누가 나온 걸까? 첫째 오강진? 아님 둘째 오경진? 발자국 소리가 선명해짐에 따라 여진은 가자미눈을 하고서 뒤를 홱 돌아보았다. 응? 아무도 없었다. 분명 발자국 소리가 들렸는데…? 오, 장난을 쳐 보시겠다? 여진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앞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정말로 가까이 왔을 때, ‘뒤후리기’로 단단히 겁을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잠잠하던 발자국의 다급히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씩 웃으며 여진이 걸음을 늦추어 보았다. 발자국 소리도 늦춰지고 있었다. 다시 빠르게 걸어 보았다. 발자국도 후다닥 쫓아오며 빨라지고 있었다. 빨라지는 발소리가 최대한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면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여진의 얼굴에 가소로워 하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좀 더 가까이 와, 요 쌍둥이! 그래, 지금이닷!

과감하게 ‘뒤후리기’를 비껴 차며 돌아서는데, 웬 낯선 남자가 외마디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엥? 오빠가 아니었어?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남자의 널브러져 있는 모습에 여진의 두 눈이 쏟아질 듯 커지고 있었다.

이 아저씨 뭐래?

“좋은 말로 할 때,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