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국(安平國)의 정비(正妃)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그녀를 위해 따로 후궁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나라의 후사를 생각하여 새로이 여인을 보아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청이 하루가 멀다고 계속되자 임금은 다른 꾀를 내었다. 바로 양자를 들이는 것이었다. 왕가의 피가 흐르되, 총기가 있고 차기 왕재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의 재주와 용모를 갖추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임금의 생각은 꽤 훌륭하게 효과를 발휘했다. 왕비의 자리를 위협하던 대신들이 제 위세에 도움이 될 만한 종가와 결탁하기 위해 바빠졌던 것이다. '임금의 성씨를 이루는 성(星), 이(彛), 언(彦), 재(梓). 이 네 분파에서 각각 열 살 가량의 아이를 한 명씩 뽑아 올렸다. 그 사내아이들이 바로 성운, 이헌, 언렴, 재문이었다. 성운과 재문은 열한 살이었고, 이헌과 언렴은 그보다 한 살이 적은 열 살이었다.'네 명의 사내아이들은 한날한시에 궁에 불려와 각기 당(堂)을 하나씩 배속 받았다. 그리고 새로이 호를 짓지 않고 그대로 대군의 작위를 부여받았다. 네 명의 사내아이를 모두 대군으로 봉하면서도 그중 하나를 미리 뽑아 세자로 세우지 않은 것은 임금의 또 다른 속셈이 있었다. 네 명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고, 이들을 장기적으로 지켜보면서 그중 가장 출중한 자를 세자로 삼겠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네 종파 중 한 아이를 일찍이 세자로 삼게 되면 다른 세 명의 대군이 속한 분파와 그 추종 세력 쪽에서는 불만을 가질 것이고, 그럼 또다시 새로운 여인을 들이라 주청하려 들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시간을 버는 것 외에도 그가 말한 것처럼 좋은 왕재를 시간을 가지고 지켜볼 수 있는 좋은 착안임이 분명했다. '대군들은 함께 모여 문무의 기량을 갈고 닦되, 별도의 스승과 배동(配童)을 두는 것이 허락되었다. '임금은 대군의 친부(親父)들에게 원하는 스승과 배동이 누구인지 물어 그들을 배속 조치해 주다가 이헌의 아버지로부터 다소 생경한 아이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배동 또한 대군들과 견주어 부족함이 없을 만큼 총명한 아이들의 이름이 거론되었기 때문에 더욱 의아하게 여겨졌다. 어지간한 신동들의 이름은 임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온해?”'“예, 전하. 태학장의 하나뿐인 여식이라 들었사옵니다.”'“여식? 딸아이란 말인가?”'“그러하옵니다, 전하.”'임금의 눈빛이 더욱 의아해졌다. 수많은 신동들을 물리치고 고작 고른 것이 집 밖으로는 거의 걸음도 하지 못했을 계집아이라니. 태학장의 자식임을 감안하더라도 딱히 명쾌하게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전하께서는 그 아이의 유별남을 들어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그는 임금에게 자신이 들은 무성한 소문들 중 일부를 들려주었다. 꽤나 흥미가 동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결국 임금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마고 약조하고 말았다. 그 길로 태학장에게 입궁이 명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태학장은 갑작스러운 입궁 명령에 부랴부랴 관복을 챙겨 입고 들었다. 평소에는 용안 뵈올 일이 좀처럼 없는 학관에게 임금이 독대를 명하다니, 간 떨리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전하, 찾아계시오니까.”'“아, 어서 오오.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가까이 다가와 앉으세요.”'둘 사이에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할 만한 일이 무에 있었던가. 태학장은 의중을 알 수 없는 임금 때문에 점점 겁이 났다. '“태학장, 여식이 하나 있지요?”'태학장은 갑작스런 임금의 질문에 눈을 껌뻑였지만, 이내 그렇다 대답했다.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올해로 여덟이옵니다. 어인 연유로 하문하시는지요.”'주군의 입가에 여린 미소가 떠오르자,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태학장 여식에 대한 흥미로운 소문을 들었습니다.”'그는 얼른 머리를 뒤졌다. 소문이라니 어떤 소문을 말하는 것일까. 어린것이 식탐이 심해 길이나 너비나 별 차이 없다는 그 소문일까, 아니면 방 안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아 걷는 법을 잊었다는 그 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계집인 주제에 책 읽기를 즐겨해 아이들이 신기하게 여기다가도 막상 얼굴을 보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는 이야기를 일컬음인가. 그의 고개가 가볍게 떨렸다. 소문이야 어찌되었건 그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소중한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아이가 무척이나 총명하다고.”'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꾸 저런 말을 꺼내시는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아 태학장은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이번에 입적시킨 대군들에 대해서 태학장도 들었을 겁니다.”'임금이 수염을 매만졌다. '“그중 이헌 대군의 배동으로 태학장의 여식이 적당한 것 같아 이리 불렀습니다.”'어쩐지 불길한 예감. 계집아이에게 배동을 시킨다니, 이제껏 들어 본 일 없는 말이었다. '“어찌 부족한 소신의 여식에게 그런 중한 일을 맡기려 하시오니까.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임금이 고개를 젓자, 그의 새가슴이 쿵쾅 무너져 내렸다.'“태학장도 어린 시절부터 이 나라 최고의 선재(仙才:뛰어난 재주. 또는 그 재주를 가진 사람.)로 불리질 않았습니까. 그러니 비록 여식이지만 기대가 될 밖에요.”'“……저, 전하.”'그러나 자식의 일인지라 그도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임금은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이보세요, 태학장. 나는 자식이 없는 몸이라 양자를 들이고 있소. 그런데 막상 아들 넷을 얻고 보니 새삼 딸아이의 재롱도 보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임금의 협박 아닌 협박. 배동이 되어 달라는 청을 거절하면 딸아이를 빼앗아 양녀로라도 삼겠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그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부들거리며 임금의 명을 받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자리를 뜨려는데, 임금이 다시 불러 세웠다.'“아이의 이름이 온해라 들었습니다.”'“그러하옵니다, 전하.”'“온해……. 어여쁜 이름이군요.”'다시 태학장이 구부정하게 절을 하고 방을 나섰다. 임금은 만족스럽게 그 아이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따가운 신료들의 주청을 피하려고 벌인 일이었는데, 예상 외로 꽤 재미도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영감.”'퇴청한 낭군을 아내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런데 태학장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얀 것이 아닌가. 단박에 심상찮은 기색을 눈치 챈 아내는 걱정스럽게 물었다.'“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아, 아니라오. 일은 무슨 …….”'“그런데 안색이 좋질 않으십니다.”'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혼절할 기세였다. 하지만 그는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약해 빠진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줄 순 없었다.'“아니, 괜찮소. 지금 온해는 어디에 있소?”'“온해라면 응당 제 방에 있지요.”'당연한 것을 그가 묻자 아내는 더 이상하게 여기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충분히 설명해 줄 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온해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온해의 방에서는 오늘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뭔가 또 일을 벌이고 있는 모양일 것이다. '“……온해야. 안에 있느냐.”'세상에서 그녀를 제일 아껴 주는 아비의 목소리다. 온해는 연기 속에서 고개를 빠끔히 들어 그를 확인하고서는 신나게 달려 나왔다.'“아버지!”'그도 온해의 동그란 얼굴을 보자 걱정은 순간 잊고 자기도 모르게 잠시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온해를 번쩍 들어 빙글빙글 돌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말라 힘이 없었고 온해는 너무 무거웠다. 그녀가 달려와 그의 다리를 덥석 붙잡기만 해도 그는 두어 걸음 뒤로 밀릴 정도였으니.'“퇴청하신 것입니까?”'“그래, 요 녀석아. 또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방 안이 온통 그을음투성이냐.”'“헤헷.”'온해가 난처하게 웃었다. 아마 스스로도 무엇을 실험하고 있었는지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온해야.”'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제 눈에는 이리 예쁘고 귀하게만 보이는데, 바깥사람들에게는 보여줄 용기가 쉽사리 생기질 않았다. 항간에 떠돌고 있는 온해에 대한 소문은 십중팔구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온해는 어려서 자신의 외모가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여겨질지 알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마음 아팠다.'아내는 처녀 시절, 안평국 최고의 미모로 이름을 떨쳤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가 세자빈이 되고, 나아가서는 이 나라 지금의 왕비마마 대신 그 자리에 오른다 해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볼품없는 백면서생인 그의 안 곁이 되었을 때 얼마나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는가.'“다 내 탓이야, 이 못난 아비 탓.”'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온해가 사탕같이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제 어미 반만 닮았어도 이리 속 끓일 일이 없을 텐데.’'그는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는 집안 식솔들을 다 불러 모았다. '“오늘부터 특훈이다. 내 명을 어기는 자는 엄하게 다스릴 것이야.”'딸아이는 아직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하지 못한 채 눈만 반짝였다.''온해는 하루 종일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늘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던 나이 많은 유모까지도 그녀와 눈을 마주쳐 주지 않았다. 이게 다 어제 아버지가 내린 엄명 때문이었다.'“유모……. 나 배고…….”'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유모는 고개를 내뺐다. '“아씨, 이러지 마세요. 쇤네, 죽습니다.”'“글치만, 글치만…….”'그렇지만, 너무 배가 고픈데 어찌 참으란 말인지.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왜 그런 명을 내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먹고픈 것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관대하던 아버지였다. 심지어 그녀가 오물오물 무언가를 먹을 때면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먹을 것을 더 내오라던 분이셨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이리 매정하게 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궁에 가는 것과 먹을 것을 못 먹는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결국 온해는 급기야 제 손가락을 입에 넣고 쪽쪽 빨았다. '“아가, 밥 먹자.”'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 온해는 얼른 뛰어나갔다. 역시 어머니 밖에 없다 감동하던 것도 잠시, 어머니 뒤에 여종이 들고 있는 작은 상이 제 밥상인 줄 알아채고는 또다시 서러워진다.'밥은 공기 절반 밖에 차 있지 않은데다 반찬은 모두 풀 가지뿐이었다. 그나마도 양념으로 버무린 것조차 없는 채소들과 소금 간으로 겨우 숨만 죽인 나물들.'“아가, 자리에 앉아라.”'온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은 식사가 아니다.'“아가, 어미가 불렀다.”'뾰로통해진 온해는 엄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터덜터덜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가 쌈을 싸서 그녀의 입 앞으로 내밀었다.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온해는 입을 벌려 쌈을 받아먹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쓴맛이 난다. '“으헥.”'먹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들을 입에 넣고 있자니 결국 작게 구역질이 나온다. 눈가가 벌게졌다. 결국 어머니는 화가 나서 수저를 내려놓았다.'“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정말 철이 없어도 너무 없구나. 이래 가지고선 궁은커녕 궁 근처에도 못 갈 것이다.”'가뜩이나 배고파서 정신이 몽롱한데, 어머니가 퍼붓기 시작하는 잔소리에 유체이탈이라도 일어날 기세다. 온해의 시선이 멍해진다. 하지만 마지막에 박히는 어머니의 무서운 말 한마디.'“너, 계속 이러다가는 네가 좋아하는 실험도 금할 것이야.”'실험을 못 한다고? 잠시 떠나갔던 정신이 갑자기 확 돌아오는 느낌이었다.'“온해, 또래 아이들이랑 어울려 놀고 싶지 않느냐?”'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전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온해가 이리 된 것은 따져 보면 모두 바깥양반 때문이었다. 온해가 작고 약하게 태어난 탓에 너무 감싸고돌았다. 바깥출입조차 시키지 않다가 이제 와서 허겁지겁 특훈이니 뭐니 해봤자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조만간 입궁하라는 연통이 왔으니 길어 봐야 보름쯤 남은 것이었다. 온해가 세상과 천천히 접촉하며 적응하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그녀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통통하다 못해 고개를 숙이면 함께 쓸려 내려오는 볼 살. 그 안에 파묻혀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이목구비. 손등과 손바닥에 소복이 내려앉아 도톰히 무리지어 있는 살들. 그런 와중에 또래보다 작기까지 한 키. 통통한 아기 배라 칭하기엔 조금 무리인 듯 보이는 뱃살까지는 갈 필요도 없었다. 발까지 작아 걸을 때 뒤뚱거리다가 넘어지기 일쑤였다.'“어머니, 말씀 잘 듣는 착한 딸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 말고…….”'온해는 무엇을 상상하는지 군침을 삼켰다.'“떡 좀 주세요. 꿀, 아님 설탕이라도 좀 발라서.”'“하아…….”'대군의 배동. 그것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여 년을 궁에 드나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입적된 대군들에 대해 간략하나마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네 아이 모두 각 종파에서 머리가 비상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선재 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었다. 온해는 그중 셋째뻘 되는 이헌의 배동이었지만, 다른 대군들과도 정기적으로 함께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수려한 미동들 사이에 어리바리한 온해가 끼어 앉아 있는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외양도 외양인데다 홀로 계집이기까지 하질 않은가. 온해가 받게 될 상처가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디 굳건히 버텨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온해야…….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그녀는 쌈을 싸면서 온해를 최대한 빨리 시집보내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온해에 대한 소문이 이미 장안에 파다하게 퍼진데다, 궁까지 드나들게 되면 과연 어느 가문에서 그녀를 데려가려 할지에 대해서는 그녀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네 명의 대군, 그리고 세 명의 배동은 이미 모여 있었다. 맏이 격인 성운이 머무는 운당 옆에 자리한 고명재(顧明齋)에서 오늘처럼 매주 모이게 될 것이었다. '“소문 들었어?”'성운과 동갑내기인 둘째 재문이 입을 열었다.'“무슨 소문 말입니까?”'“아직까지 오지 않은 마지막 배동에 대한 소문.”'재문의 말에 여섯 사내아이가 일시에 그를 응시했다. '“다들 궁금한 모양이네?”'그가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의미심장하게 첫마디를 꺼내려는데, 성운이 무표정하게 말을 잘랐다.'“됐다. 일개 배동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만큼 한가하지 않아.”'“쳇.”'재문이 입을 삐죽대며 성운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성운은 여전히 관심 없는 표정으로 손에 든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이헌은 사실 궁금했지만 그들과 말을 섞지는 않았다. 그와 나이가 같지만 달포 늦게 태어난 탓에 막내가 된 언렴도 그저 어렴풋한 미소만 지울 뿐 말이 없었다. '“막상 들으면 다들 놀라 뒤로 자빠질 텐데?”'결국 듣고 있던 배동들이 묻는 바람에 온해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내가 듣기론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제가 듣기론 계집이라 하더이다.”'“맞아, 계집이긴 하다더군.”'“그럼 뭡니까? 계집이긴 한데, 사람이 아니라니. 혹시 선녀님이라도 되는 모양이지요?”'“선, 선녀?”'재문이 배를 잡고 깔깔댄다. '“순진들 하기는! 선녀는커녕, 그냥 소녀 근처에도 못 가는 무시무시한 박색이란다.”'“에이, 그게 뭡니까.”'“그게 끝이 아니야.”'또다시 재문에게 눈이 모여든다.'“이름이 온해라 하더라고.”'“그것이 또 어때서 그럽니까.”'“따뜻할 온, 돼지 해.”'“따뜻한 돼지라고요?”'다들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요!”'재문은 이헌을 바라보며 비웃듯 피식거렸다.'“대체 네 친부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아이를 천거하신 것인지…….”'하지만 이헌 역시도 저들과 마찬가지로 아는 것이 없어 대꾸하지 못했다.'“어쩐지 믿기지가 않는데요.”'배동 중 하나의 말에 재문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보게. 내 말이 참인지 곧 확인하게 될 테니.”'재문의 자신만만한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저쪽 길 끝으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한 사람은 길을 안내하는 내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꾸물꾸물 걸음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헌도 제 배동이 돼지 소리를 듣는다는 말에 불안한 얼굴로 다가오는 사람들에 눈을 고정하고 지켜보았다. 천천히 가까워지며 자세해지는 모양새. 여덟 살이라기에 여기 아이들보다는 조금 작을 줄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짐작보다 더 작았다. '배동들은 점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입을 막고 킥킥대는 아이도 하나 있었다. 재문은 제 말이 참인 것이 증명되는 이 순간이 당연하다는 듯 오만하게 등을 펴고 앉아 있었고, 여전히 성운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헌은 불안한 표정으로, 언렴은 여전히 얕은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옷을 입혀 놓은 공 같았다. 머리는 작고, 배가 빵빵한데다 발까지 작아 꽤나 균형 잡힌 구(球)형의 본새처럼 보였다. 어쩐지 위에 붙은 듯이 보이는 머리카락이 어색해 보일 지경이었다. 없는 편이 공이라 여기기에는 더 적합할 테니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볼과 배가 파동을 일으키며 함께 움직였다. 내관이 다가와 성운에게 고할 때쯤이 되자 배동들은 다들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붉어져 금방이라도 곧 터질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배동을 들게 하고, 자네는 이만 가보게.”'성운이 여전히 관심 없는 목소리로 내관을 돌려보내자마자, 고명재 가득히 웃음소리가 울렸다. '“아하하하, 정말 맞네. 따뜻한 돼지.”'온해는 갑작스러운 그들의 웃음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 이른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름 곱게 갖춰 입었음에도 비웃음 외에는 들려오는 것이 없다니. 첫 궁 나들이에 설렜던 것이 조금 전이었다. '성운이 짜증스럽게 다른 배동들을 보자, 다들 그 위세에 웃음을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재문이 언제 그랬는가 싶게 다정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어서 오게.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어. 자네 자리는 저기일세.”'그가 이헌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온해는 얼른 신을 벗고는 재에 올랐다. 다들 온해가 벗은 신에 다시 눈이 한 번 모였다. 발이 작아, 신도 꽤 앙증맞게 작았다. 그래서 더 기이하게 보였다. 온해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아주 잠깐 이헌을 보았다. 이헌은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다. 두 살 어린 계집아이가 온다 해서 사가의 제 여동생처럼 귀여운 아이일 줄로 생각하였는데, 온해는 여동생과 전혀 딴판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는 더 침울해진 온해가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녀가 움직일 때 펄럭이는 기척이 어찌나 센지 다들 먼저를 먹어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댔다. '“이헌 대군마마의 배동에게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배동 중 제일 심하게 웃던 아이가 결국 농을 걸고 말았다.'“정말 따뜻할 ‘온’에, 돼지 ‘해’자를 씁니까?”'그의 말에 다들 참지 못하고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온해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눈에서 떨어진 눈물방울이 치마폭을 적시는 것을 이헌은 보았다. '“다들 그만 하래도.”'재문이 막아 주는 척 나서는 것에 다들 더 웃음이 터졌지만, 온해는 그가 저를 위해 주는 것인 줄 알고 조금 위안이 되었다. 이헌은 어쩐지 사내아이들 사이에서 울고 있는 그녀가 조금 가엾어졌다. 그래서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그렇습니다. 제 배동입니다. 그만들 하십시오.”'온해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제 와서 저리 위해 주는 척해 봤자, 조금 전 저를 보던 눈빛은 당황과 실망 그 자체였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여덟 명이 매주 고명재에서 함께 강학을 청해 들을 것이다.”'성운이 이헌의 말을 받아 설명을 시작했고, 다들 그제야 잠시 잠잠해졌다. '“모두들, 정해진 날에는 한 시진 전에 모여 선주(先週:지난주)의 강학을 시험토록 한다.”'“무예도 함께 수련하는 것입니까?”'또 작게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 안에는 계집인데다 몸놀림이 둔한 그녀를 놀리기 위한 짓궂은 의미가 숨어 있었다. 또 온해의 눈에 물방울이 맺히는 것을 이헌은 눈치 채었다. 다만 지금 그녀를 위로하면 그녀가 더 서럽게 울 수도 있고, 아이들이 더 심하게 놀릴 것이 걱정되어 그저 곁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그렇다. 다만 무예는 대군들끼리 매주 가볍게 경합을 치룰 것이다. 배동들도 함께 자리하도록 한다.”'성운이 드디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너, 이헌 대군의 배동.”'온해가 허리를 굽혀 그의 부름에 응답했다. 물론 그녀의 움직임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따라왔다.'“앞으로는 대군들이 너를 기다리게 하지 마라.”'“명, 명심하겠사옵니다.”'“그럼, 서로 안면을 익혔으니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한다.”'그녀의 대답 직후, 성운이 무심히 찬바람을 일으키며 제일 먼저 자리를 떴고, 후다닥 그의 배동이 따라나섰다. 하나둘씩 자리를 떴지만, 온해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재문 대군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환영하네. 함께 잘 해 보세.”'물론 그 말을 마치고서는 입술에 힘껏 힘을 주어 또다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막아내는 모습을 온해는 보지 못했다. 다만 처음부터 웃는 얼굴로 다정히 맞아 준 이는 그 밖에 없어 그저 고맙게 여겨질 따름이었다.'결국 이헌과 온해만이 남았다. 이헌은 고개를 조금 낮춰 걱정스럽게 그녀를 보았다.'“이제 모두 다 갔네.”'아주 천천히 온해의 허리와 고개가 제자리를 찾았다. 여동생이 울 때 제가 업어 주어 달랬던 것이 생각났지만, 눈앞의 계집아이는 그가 업기에 무거워 보여 어찌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아, 먹을 것.’'그는 얼른 소매 자락에서 종이에 싸인 엿을 꺼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함께 공부할 배동이 생긴다는 소식에 미리 준비했던 것인데, 미처 건넬 짬이 없었다.'“이것 먹어 보게. 내 자…….” '“우아앙앙…….”'결국 온해가 서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먹을 것을 가지고 놀리는 왕자, 저를 보고 단박에 놀란 얼굴을 했던 왕자,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로 웃지도 않고 아픈 곳을 쿡쿡 쑤셔대는 저 나쁜 왕자와 앞으로 몇 년이나 지내야 한다니. 세상살이가 원래 이리도 힘든 것임을 그 덕분에 알았다. 서럽게 큰 소리로 울어대는 온해를 이헌은 얼굴을 붉힌 채 잠자코 지켜만 보았다. '그렇게 온해는 열 살의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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