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얼마나 마셔버린 건지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꼭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희수의 얼굴이 괴로운 듯 구겨졌다. 그렇게 술을 마셔대려고 시작한 자리가 아니었는데 나중엔 점점 술이 술을 먹는 풍경이 되고 말았다. 머리를 꽁 쥐어박으니 절로 깊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 지난 저녁 술자리의 시작은 혼자서 20년 동안 딸 키우느라 고생해온 엄마의 제2의 인생을 위한 보금자리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일에 함께 다녀준 오랜 친구들에게 희수가 한 턱 쏜다며 들어간 자리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집 맥주가 지나치게 맛있다는 것이었고 더 큰 문제는 그게 비단 희수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 다들 정말 신나게도 마셔댔다. 맥주 마시기 딱 알맞게 실내 곳곳에 적당히 따스한 공기를 머금도록 신경 써둔 수완 좋은 사장 덕분인 것도 같다. 어느 정도 알딸딸해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술을 마시는 속도는 느려져갔다. 그러자 누군가가 진실게임을 하자며 다시 흥을 돋웠다. 그래 뭐 그것도 괜찮겠지 싶어서 처음에는 이런저런 가벼운 질문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누군가 첫사랑에 대한 질문을 꺼내면서부터 모든 질문이 첫사랑이 되어버렸다. 그 후론 당연한 수순처럼 하나둘 감상적으로 변해 갔고, 또 당연하듯 늘어나는 술병의 수만큼 취해갔다. 이제 갓 스물셋, 꼭 첫사랑이 아니어도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순식간에 감상적이 될 수 있는 나이였다.' 희수에게도 첫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랑이 있었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다니던 그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만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듯 멍해졌고, 또 그러면서도 행여 들킬까봐 시선을 비껴가며 마음 졸이게 했던 단 한 사람. 그 첫사랑을 떠올릴 때면 대부분은 서글퍼지는 게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또 다른 인연으로 맞닿아 사랑이라는 걸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나가 샘솟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이곳에 없고 그녀의 마음속엔 전하지 못한 감정들만 꾹꾹 쌓여 용량초과인 상태라는 게 현실이다.' 희수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꾹꾹 누르다 하나씩 떠오르는 친구들의 첫사랑 얘기들 때문에 혼자서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고백이라도 해 봤으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았을까? 후우, 돌려놓을 수 없는 그 시간은…… 그 사람이 생각나는 순간순간 나를 통곡하고 싶어지게 만들어.’' 희수는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입은 쩍 벌어지고 눈은 이보다 더 커질 수는 없다 싶을 정도로 휘둥그레졌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통곡하고 싶다니! 아니 누구 마음대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는 아니잖아, 정희수! 이건 정말 술의 농간이었다.'“하아, 미쳤어,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미쳤어, 정희수! 미친 거야!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몸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로 취했으면서 차라리 곱게 잠이나 잘 것이지 그런 말을 대체 왜 한 거냐고!”' 그녀의 손에서 아무 죄 없는 머리카락들이 다 뜯겨나갈 지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그 특유의 비웃는 얼굴이 생각나서 희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아, 잠깐! 내가 이름을 얘기했던가?’'그건 확실히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어쩌면 말을 안 했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희수는 서둘러 핸드폰 목록을 뒤져 어제 함께 있었던 친구들 한 명 한 명과 통화를 해나가기 시작했다.'[응? 네가 그런 말을 했었나? 글쎄 기억이……]'[근데 나는 어디까지 얘기했었는지 혹시 기억나니?]'[아마 술 안 취했던 애는 내내 피부 걱정만 하던 정원이밖에 없었을 걸?]'[…….]'[…….]' 이것들, 친구라는 것들이 모두 하나같이 제 실수, 제 첫사랑의 안부부터 묻는다. 희수는 할 말이 없어졌다. 5명이 다 이 지경이라니. 그래, 우린 모두 그 나물에 그 밥이었어. '결국 그 서정원한테 전화를 해야 하는 수밖에 없어졌다. 싫은 한숨이 저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희수를 싫어했던 친구가 서정원이었다. 언뜻 들리는 얘기로는 희수에 대한 대부분의 소문의 끝엔 정원이 있다는 말도 수없이 들었다. 그래서 솔직히 정원에게 전화하는 건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은데, 문제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국 두통도 채 가시기 전에 맛보게 된 좌절감 앞에서 희수는 처연한 한숨을 흘리며 다시 한 번 전화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웬일이니, 네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저기…….”'[나 바빠! 빨리 얘기해!]'하여간 계집애, 성질머리하고는…… 씨이…….'“혹시…… 어제 내가 하던 말들…… 너 들었어?”'[뭐, 무슨 말?]'되묻는 품새가 어째 못 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하긴 희수의 목소리가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니까. 안도라는 단어 하나가 스멀스멀 머릿속을 채울 즈음 희수는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아냐, 아냐. 하던 일 해. 바쁘다며. 좋은 아침이야. 그만 끊을게.”'[잠깐, 정희수!]'“……?” '[너 혹시 아니? 드디어 돌아왔다던데. 너를 통곡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 이.시.윤. 선배 말이야.]'반쯤 내려가던 팔이 다시 귓가로 바싹 올라가서 붙었다.'“무슨……소리야? 너 그럼…… 다 들었던 거야?”'[당연하지 않니? 그 조용했던 공간에서 그것도 지척에 있던 내가 못 들었을 리가 없잖아. 모르긴 몰라도 아마 건너 테이블에 있던 시윤 선배도 들었을지 모르지.]'“……뭐? 그,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건너 테이블이라니? 누가? 시……윤 선배가? ……시윤 선배, 돌아왔어?”'[좀 전에 말했었잖아. 돌아왔다고. 암튼 이만 끊어야겠어. 미용실 예약해뒀거든. 며칠 있으면 개강이잖니. 그때 확인해보면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겠지.]'“자, 잠깐만 정원아! 그래서 이시윤 선배가 들었단 거야, 아니란 거야? 그것만 말해줘!”'[글쎄다.]'“그럼 부탁 하나만 할께. 만약 안 들었다면 제발 얘기하지 말아줘. 부탁이야.”'[하, 정말 별꼴이다, 너! 네가 얘기해달라고 애원을 해도 난 해줄 생각이 없어. 게다가 시윤 선배 좋아하는 애들이 어디 한 둘이니?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시윤 선배를 좋아해. 아! 따끈따끈한 소식 하나 더 얘기해줄까? 시윤 선배 바로 복학한다더라. 알지, 선배가 나랑 같은 과라는 거? 그럼 이제 정말 끊는다.]'복학……한다고? 그럼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거야? 이시윤 선배가?' 희수는 멍한 얼굴로 끊어진 전화기를 손에 들고 한참 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2년 만이었다. 2년 만에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희수는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애써 억눌러보려 노력했지만 스무 살 당시의 마음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머릿속과 가슴속은 막무가내로 복잡해지기만 했다. '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할 일을 태산같이 쌓아두고서도 꼼짝을 못하고 있는 정희수라니. 한참을 그렇게 과거 속에서, 또 현재에서, 그리고 그를 보게 될 눈앞의 미래 속에서, 아직도 여전히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정신없이 헤매어 다니고 있었다. 아니, 이건 취중보다 더 심했다.' ' 오후나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맘이 급해진 희수는 내내 발을 동동거리며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휴, 이제 좀 정리가 된 건가?”' 팔을 동동 걷어붙인 희수는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가 얼른 일어나서 방바닥으로 쓰러지다시피 앉았다. 재혼이라 하지만 엄마에게 있어서도 또 오랫동안 엄마를 사랑해온 새 아빠에게 있어서도 이 재혼은 그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그 분들만의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주저앉고 싶진 않았다. 최대한 행복하시기를……. 그런 마음에 새삼 또 가슴이 벅찼다.' 일산의 새 집은 완벽하게 엄마의 기호로만 똘똘 뭉쳐 있는 집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큰 창문, 엄마가 좋아하는 다락방 같은 느낌의 큰 침실, 엄마가 늘 얘기하던 벽난로가 있고 도서관처럼 책들로 둘러싸인 거실. 오랫동안 그걸 다 기억해두고 엄마의 곁을 지켜오다 이렇게 현실로 재현시킨 새 아빠의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더욱 감사한 집이었다. ' 엄마와 새 아빠의 침실을 예쁘게 만들어놓겠다고 엄청 큰소리 쳤었는데. 이 정도면 예쁘다 하시려나? 다시 한 번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쭈욱 둘러보고 문을 나서는데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미주였다.'“어, 미주야!”'[너 괜찮아?]'“응, 아직 머리가 좀 지끈거리긴 하는데, 그래도 몸을 움직였더니 좀 살 것 같긴 해.”'[그러게 어지간히 마시지. 내가 어젯밤에 불려나가서 너 데려다준 건 알고 있지? 조만간 거하게 쏴라.]'“훗, 그래.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