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일산의 한 주택가에 이른 아침부터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구급 대원들이 들것을 챙겨 어느 한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 소리에 급하게 뛰쳐나오며 구급 대원을 맞은 것은 그동안 현숙의 집에서 가사 일을 도맡아 하던 수원댁이었다. '“이쪽, 이쪽으로 어서요!”'“무슨 일입니까? 환자 분이 자해를 했다는데…….”'“아우! 저도 모르겠어요. 욕실에 들어간 사모님이 하도 안 나오셔서 문을 열었더니 글쎄……. 욕조와 바닥에 피가 흥건해서 어찌나 놀랐던지, 119에 전화를 했네요. 사람이 독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구급 대원을 안내하면서 상황을 설명하던 수원댁은 다시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럼 아직까지 환자를 욕실에 두셨다는 말씀입니까?”'“아니,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여기에요, 여기!”'“비키십시오.”'꼭 닫힌 문을 가리키는 수원댁을 지나치며 구급대원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당황스러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아직도 환자를 그리 두었다는 말에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라도 그랬을까. 속내를 알지 못하는 구급대원에게 수원댁의 조치는 환자 입장에서 볼 때 참 야속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그림이라니…….'알몸의 여자가 물 빠진 욕조의 난간에 엎드린 자세로 팔 하나를 욕조 밖으로 치켜들고 있었다. 그 팔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지나 하수구로 사라진 피의 양만큼 여자의 생명도 꺼졌을 것이다. 하수구 옆에 나뒹굴고 있는 커터 칼이 여자가 선택한 마지막 길동무였던 모양이었다. '일단 여자의 경동맥에서 미약하게나마 맥박을 느낀 구급대원은 가져온 모포로 여인의 알몸을 감싸고,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손목을 지혈했다.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다. 바로 눕히고 호흡을 확인한 결과 약하지만 스스로 숨도 쉬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해를 한 여자는 제 손목을 그리 힘 있게 긋지는 못한 듯했다. 구급대원들에게는 다행이요, 그녀에게는 불행이었다. '숨이 붙어 있다는 구급대원의 말에 수원댁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들것에 실려 나가는 현숙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핏기 없는 현숙의 자는 듯한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는 것에 수원댁의 입안에 씁쓸함이 고였다. ''쨍그랑, 시혁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던 가희의 손에서 접시가 미끄러져 산산조각이 났다. 커피를 내리고, 갓 구워낸 식빵을 접시에 담아 들어 속으로 준비한 계란부침을 빵 위에 얹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바닥이 유리 파편과 토스트 재료들이 한데 엉켜 엉망이 되었다. 커다란 소리에 행여 시혁이 깨지나 않았을까 싶어 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숙였다. 우선은 흔적을 없애는 것이……. 이런, 그마저도 늦었다. 가희는 가까워져 오는 발걸음 소리에 미약한 한숨을 삼켰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 잠깐! 움직이지 마!”'잠귀가 밝은 건지 온 신경을 그녀에게로 뻗고 있는 건지, 시혁이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다가오다, 그녀가 깨진 유리 파편으로 손을 뻗는 것을 보고 소리치며 달려왔다. '“이, 일어나셨어요?”'“조심해서 이쪽으로 나와. 내가 치울게.”'“아니에요. 제가 치울게요.”'“고집 부릴래? 잘못해서 손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네가 다치면 내가 속상해서 안 돼. 나와.”'그래도 머뭇거리는 가희를 번쩍 안아 자신의 뒤쪽으로 이동시킨 시혁이 그녀의 정수리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 그 자리에서 꼼짝 말 것을 명령했다. '“다 된 거였는데…….”'“그런 것 같군.”'정성스럽게 준비해서 그에게 먹이려던 꿈이 허망하게 날아간 게 아쉬워 웅얼거리는 가희에게 맞장구를 쳐 주며 시혁이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직 하나 남았지? 그거 둘이 나눠 먹자. 음, 커피 향이 근사한 것이, 식욕이 막 돋는데?”'침울해진 그녀를 달래듯 시혁이 킁킁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의 집이었다. 매일 마셨을 커피, 오늘따라 향이 특별할 리도 없다. 그러나 깔끔히 뒷정리를 한 시혁은 향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활짝 웃었다. '그녀를 식탁에 앉혀 놓고 시혁이 커피를 따르고 나머지 토스트를 완성했다.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토스트를 한 입씩 베어 물고, 상대방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손가락으로 닦아 달게 빨아먹는다. '우아한 식탁 위의 그림과는 다르게, 식탁 아래 서로 얽힌 다리로 장난질을 친다. 발가락을 꼼지락 상대를 도발하면, 그에 응하는 상대는 더욱 대담하게 다리를 올린다. 수줍게 도망가는 자와 쫓기는 자, 식탁 아래에선 엉큼한 발들이 한데 엉켜 사랑놀이가 한창이었다. '''빠르게 집을 빠져나가는 구급대원을 따라 나간 수원댁은 구급차에 실려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는 현숙을 확인하고서야 김 실장을 생각해냈다. '그녀가 막 휴대전화로 김 실장의 전화번호를 눌렀을 때, 저만치 골목 입구에 휴가를 다녀오는 입주 간호사 은주가 보였다. '그녀가 집 앞에 서 있는 구급차를 보고 달려왔다.'“어머! 아주머니. 웬 구급차에요?”'“그래, 마침 잘 왔어. 은주가 따라가면 되겠네. 어서.”'“네? 아니, 사모님이 왜…….”'은주는 자신을 구급차로 미는 수원댁에 밀리며 그제야 구급차 안에서 현숙을 확인하고 기암을 했다. 그녀가 아는 한, 현숙은 불편한 다리를 제외하면 건강한 여성이었다. '“손목을 그으셨어. 에휴, 어찌나 놀랬던지. 나 혼자 있는데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차 출발하려나 봐. 은주는 빨리 뒤에 타고. 나는 김 실장에게 연락할게.”'“알았어요. 어느 병원으로 가는지 제가 김 실장님께 전화 드릴게요.”'“응.”'은주를 태운 구급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수원댁은 휑하니 집 앞에 혼자 남아 주변 집들을 둘러보았다. 이른 시간이라지만, 이웃의 소동에 어느 누구 하나 내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현숙의 집이기에 내다보던 사람들도 고개를 젓고 사라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용인에게 인색하고 이웃에게 불친절한 것이 현숙이었다. 그나마 그녀를 조용히 시킬 수 있는 사람이 김 실장으로, 그가 현숙을 대하는 태도로 볼 때 주종관계라기보다는 감시자에 가까웠다. '몸이 성할 때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