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었어? 진환 선배가 돌아왔다는 얘기?”'애라가 자리에 앉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내게 퍼부었다.'“진환 선배가?”'“그렇다니까. 아직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왔대.”'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이름. 송진환. 그의 이름을 듣자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연신 언니는?”'“모르지. 그동안 아무하고도 연락한 적이 없으니까.”'항간에 소문으로는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얘기도 있었고, 결혼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3대 독자인 그가 결혼을 일찍 했을 거라는 데는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어떻게 변했을까? 진환 선배 좀 멋졌어? 노래도 잘하고.”'애라는 옛날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때 멋진 선배들이 참 많았지. 유별나게…….]'그중 진환 선배만큼 인기가 많았던 상현 선배와 애라는 결혼을 했고, 그들은 벌써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가끔 곗날처럼 그때의 멤버들이 모이면 우리는 추억에 잠겨 옛날이야기를 질리지도 않고 계속 되풀이하며 웃었다. 누가 그랬었지, 어땠었지. 가끔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씹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하면서 철없고, 어렸지만 가장 순수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추억을 새기고, 또 되새겼다.'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십 년 전 학교 노래 동아리 방에서였다. 그때 나는 노래는 잘 못하지만 부르고 싶은 큰 열망이 수줍음을 이겨낼 만큼 무모한 스무 살이었다. 노란색으로 가득한 동아리 안내문을 읽고 몇 번을 망설이다가 큰 용기를 내어 동아리 문을 열었지만 실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경 하나하나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가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휴우.”'나는 괜히 가슴이 벅차 동아리 방을 둘러봤다. 아무도 들어오란 얘기도 안 했는데, 혼자 무슨 김칫국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동아리 방에 가지고 있던 환상과는 달리 실내는 꽤 너저분했다. 여기저기 악보가 흩어져 있기도 하고, 누군가 먹다 남긴 커피와 과자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우선 발에 걸리는 책과 악보를 들고 한쪽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도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평소 깔끔하지도, 정리를 잘 하지도 않는데, 왜 그랬을까?'나는 악보 정리하는 중에 눈에 익은 노래를 발견했다.'[당신이 사랑을 버릴 때, 난 이미…….]'악보에 있는 가사 대로 나는 흥얼거리다가 아무도 없는데 어때 하는 마음으로 소리를 내서 부르기 시작했다. 누구나 혼자 있으면 가수 아닌가?'[당신이 사랑을 버릴 때, 난 이미 사랑에 빠져 헤어날 수 없었고 사람이 사랑을……오우 예에에에에.]'어느새 노래에 도취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아지경에 올랐다. 어디에서든 적응력과 집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였다. 되도 않는 랩까지 비트박스를 넣으며 팔, 다리 허우적거리며 댄스까지 시작하던 판이었다.'“시끄러워!”'갑자기 무엇인가가 내 앞을 번개처럼 날아가더니 벽에 부딪쳐 퍽 소리를 냈다.'“꺄악!”'난 머리를 감싸 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뭐야? 시끄럽다니까!”'구석 테이블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잘못했어요!”'실눈으로 눈을 살짝 뜨자 맨 처음 시야에 들어온 건 긴 테이블 아래로 보이는 멋지게 낡은 운동화와 청바지에 감싸인 긴 다리였다. 내 시선은 긴 다리를 따라 올라 검은 그림자의 얼굴에서 멈췄다. 두터운 잿빛 후드 티셔츠에 갸름하고 흰 얼굴의 남자.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의 단잠을 깨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눈을 내리깔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아.”'사람이 첫눈에 반한다는 느낌은 그런 것이었을까? 그 사람만 보이고, 그 주변은 뿌옇게 변해버리는 것. 내 영혼이 갑자기 한없이 투명하고, 가벼워져서 내 육체를 빠져나가 버리는 것. 그런 걸까? '나 같은 애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담배를 태우는 그 남자 앞에 얼어붙은 채 그대로 멈춰버렸다. 어쩌면 그때 내 심장은 정말 심박을 잃고 잠깐 멈췄을지도 모른다.'“뭐야? 처음 보는 거 같은데…….”'그는 여전히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저 죄송합니다.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인데요. 여기 들어오고 싶어서 그만…….”'“지금 아무도 없어. 다들 밥 먹으러 갔으니까.”'“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나는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제발 내가 이 문을 나서기 전에 누군가가 들어왔으면, 아니, 그가 나를 불렀으면 하고 속으로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주문처럼 외웠다. 문손잡이에 내 손이 닿았을 때 그 일은 이루어졌다.'“야!”'“네?”'그가 왜 불렀을까? 이름이라도 물어보려는 게 아닐까?'“추우니까 문 꼭 닫고 가.”'“네.”'그럼 그렇지. 나는 끓는 물에 데쳐진 시금치처럼 순식간에 풀이 죽어 다시 돌아섰다.'“야!”'그가 다시 불렀다. 세상에 ‘야’라는 단어가 그리 달콤하고, 설레는 것인지 미처 몰랐다.'“네.”'이번엔 기대 없이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내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이름?”'“한…… 승연이요.”'“알았어. 가봐.”'그게 그와 나의 첫 대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