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던 연수는 시원이 등교하고 나서야 거실로 슬그머니 나왔다. 다행히도 오늘 그녀의 수업은 휴강이었다. 종전 학교에 다녀온다는 그의 말에도 그녀는 이불을 푹 덮어 쓴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 이제 그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차라리 필름이라도 완벽하게 끊겨 버렸다면 덜 민망할 텐데. 점점 선명해지는 그와의 뜨거운 행위에 또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갑자기 이는 갈증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연수는 짙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인생의 첫 섹스를 이런 식으로 저질러 버리다니! 깨끗하고 정갈하게 씻지도 않은 상태에서, 거기다가 술 냄새, 안주 냄새까지 폴폴 풍기면서. '부끄러운 마음에 연수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속옷도 아무거나 입고 있었는데. 방바닥에 떨어져 있던 브래지어와 팬티를 생각하며 또 한 번 절망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북북 긁던 연수는 욕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헐렁한 티셔츠를 들어 자신의 몸매를 비추어 보았다. 어제 맥주와 안주를 얼마나 마시고 먹어대었는지 아직 조식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볼록하게 나와 있었다.'“아아아아악! 미쳤어!”'자신의 두꺼운 허벅지를, 아름답지 못한 가슴을 그가 모두 다 숨김없이 보았을 거라는 생각에 연수는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너무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당분간 별거를 할까’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녀는 이내 체념하고 말았다. 욕실의 차가운 벽에 슬며시 기대 선 연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발 끝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다이어트라도 할 걸. 아니, 안주라도 좀 적게 먹을걸!”'시원한 맥주에 바삭한 치킨을 미친 듯이 먹어대었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이어 그녀의 오동통한 몸매와는 반대로 매끈하게 잘 빠져 있던 그의 몸매가 뇌리를 스쳤다. 자신의 두 손을 잡은 채 지그시 내려다보던 그의 모습.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몸을 꿰뚫던 그의 단단한 분신의 느낌.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도리질을 치던 연수는 제 방의 침대로 가서 벌러덩 누워버렸다. 항상 느껴지던 자신의 체취와는 다른 그의 향기가 여전히 진하게 배어 있었다. 폭신한 침대 시트를 손바닥으로 매만지던 연수는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있던 거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바로 누운 채 거울을 위로 들어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그 순간, 그 녀석의 눈에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한동안 가만히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보던 연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거울을 쓱 내렸다. 사랑스러워 보이기에는 볼 살이 너무 많았다. 처참한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던 연수는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으며 두 주먹을 꼭 쥐었다.'“그래, 저질러 놓고 후회하는 건 서연수답지 않은 행동이다! 이미 지나간 일에 집착 하지 말고……!”'순간, 꼬르르륵! 뱃속의 녀석들이 또 다시 배가 고프다며 아우성을 쳐대었다. 어제 그만큼 먹어주었으면 됐지, 얼마나 더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게냐! 볼록한 정도를 보니 아직 축적된 양식이 많은 것 같은데! 이 욕심 많은 것들! 내가 너희들 때문에 허리가 휜다, 휘어!'먹고 또 먹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뱃속의 녀석들을 향해 속으로 버럭버럭 성을 내면서도 그녀는 어느새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속이 쓰린데 라면이라도 하나 먹어주어야겠다는 본능적인 생각 때문이었다.'그런데 부엌 여기저기를 뒤져보아도 라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밤에 두 개 남은 녀석을 간식이라는 명목 하에 삶아 먹었던 것 같다. 아아! 이런 절망적인 순간이! 하는 수 없이 다른 음식물을 섭취하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연 연수는 허무하게 입맛을 다셨다. 먹을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해장을 하기 위해 또 다시 술을 마실 수도 없고, 그가 즐겨 먹는 과일도 당기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뱃속이 원하는 것은 매콤하고 얼큰한 라면이었다.'연수는 하는 수 없이 주섬주섬 라면 사러 나갈 준비를 했다. 고무줄로 머리를 한 가닥으로 꾹 묶은 다음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윗옷을 걸쳤다. 그리고 지갑을 챙겨든 그녀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현관문을 나섰다. 격한 운동을 한 다음날처럼 온 몸이 노곤하고 피곤했다.'엘리베이터에 올라 문을 닫으려는 데, 낯익은 남자가 틈 사이로 올라탔다. 옆집 남자, 현민이었다.'“안녕하세요.”'“아, 네.”'편안한 복장의 현민을 슬쩍 쳐다본 연수는 캡 모자를 더욱 눌러썼다. 왜 하필 이런 몰골로 있을 때! 눈 밑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는 민낯을 외간 남자에게 보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마트에 가세요?”'“네.”'연수는 짧게 대답했다.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그녀를 보며 현민은 피식 웃었다.'“같이 가면 되겠네요. 저도 마침 마트에 가는 길이었는데.”'거절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에서 엘리베이터는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멈추어 섰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연수와 현민은 나란히 마트로 향했다. 날씨가 참 맑았다.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수는 옆에서 걷고 있는 그를 힐끗 보았다.'“그쪽은 여자친구 없어요?”'현민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걷고 있는 연수를 보았다. ‘아저씨’라는 호칭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쪽’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왜요, 없다면 그쪽이 나랑 만나 주게요?”'“네? 왜 이러세요, 저는 엄연히 남편이 있는 몸이라고요.”'연수의 단호한 대답에 현민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마트로 간 두 사람은 각자의 장을 보기 시작했다. 연수는 카트를 질질 끌고 다니며 라면을 종류별로 선택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색다른 맛을 즐기기 위해 비벼먹는 자장라면도 챙겨 넣었다. 50% 폭탄 세일 문구에 홀랑 넘어가서 커다란 아이스크림과 우유도 덥석 집고, 텔레비전을 보며 먹을 비스킷과 간식거리도 카트에 듬뿍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원이 좋아하는 사과도 예쁜 것만 정성스럽게 담아 넣었다.'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있자, 현민도 장을 다 보았는지 카트를 끌고 다가와 섰다. 그의 카트에 담긴 것은 음료 두 캔과 치즈였다. 고작 저걸 사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단 말인가. 먼저 계산을 끝낸 연수는 묵직한 마트 봉지를 들고 한층 무거워진 걸음을 옮겼다. 들고 갈 생각은 못하고 너무 많이 샀나보다. 봉지가 걸려 있는 손바닥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라면만 빼고 모조리 환불을 받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봉지를 다잡으며 ‘넌 할 수 있어! 이걸 집까지 옮길 수 있어!’라며 자기 자신에게 응원을 해주고 있던 연수는 곁으로 다가와 서는 인기척에 얼굴을 쓱 올렸다. 그러자 현민이 그녀의 마트 봉지를 가져가서 들며 말했다.'“뭘 이렇게 많이 샀어요. 아까 보니까 다 먹는 거던데. 그쪽이 다 먹을 거죠? 남편은 많이 안 먹을 것 같던데.”'“뭐라고요? 이리 내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