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도시락을 후다닥 먹어치운 아이가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대뜸 명우를 불렀다.'“담임이 찾아.”'“나를? 왜?”'“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쩌냐.” '“아…….”'“뭐, 잘은 모르겠지만 딴 애들이 그러던데 수련회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라.”'명우는 맞아! 그렇지, 하고 감탄사를 나지막이 내뱉었다. 분명 며칠 전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잠깐 흘려들었던 적이 있었다.'“오래 안 걸리니까 지금 바로 교무실로 오라 하시더라.”'“알았다.”'명우는 즉시 바쁜 걸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교실의 뒷문이 닫히고, 그제야 명우의 뒤편에 앉았던 경서는 들릴 듯 말 듯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모르게 명우에게로 힐끔 따라붙던 시선이 제 자리를 잃어버린 듯 허공을 뱅뱅 맴돌다가 이내 오후의 햇살이 따갑게 내려쬐는 창밖을 향했다.'벌써 여름의 절정으로 가고 있는데 뜨거운 햇살이나마 즐기러 나온 아이들이 듬성듬성 앉은 스탠드 앞으로 펼쳐진 너른 운동장은 어쩐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마음이 심란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나이답지 않게 노쇠한 생각을 해보지만 축 처진 기분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인구 많은 서울이나 대도시라면 또 모를까, 경서로서는 이런 중소도시에선 결코 흔하지 않은 남녀공학 학교를 지원해 시험을 치르고 입학한 이후 누군가가 이렇게나 신경 쓰였던 적은 이제껏 없었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여자아이의 정신연령이란 남자아이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경향이 있기에 같은 반 남학생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생기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요즘 들어 경서는 계속 명우의 뒤꽁무니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점점 늘고 있어서 난감할 지경이었다. 경서는 살짝 붉은 기가 감도는 뺨을 문지르며 다시금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경서의 어깨를 살짝 두들기는 손이 있었다.'“뭔데 그렇게 심각해? 옆에서 보면 어디 아픈 줄 알겠어, 얘.”'한창 딴 생각에 빠져 있던 경서가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매점에 다녀오는 길인지, 책상 사이의 조그만 공간을 건너 옆에 앉은 탓에 얼굴을 맞대는 횟수가 좀 많은 편인 란희가 우유를 입에 물고 경서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냥…….”'뭐라 말해야 할지 잘 몰라서 슬쩍 얼버무리며 시선을 치워내는데 한 층 바로 아래 위치한 교무실에 금세 다녀온 명우가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섰다. 두근두근. 한순간 빠르게 두 박자 뛴 가슴께를 슬그머니 쓰다듬으며 경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그러 물었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사이좋게 지내는 친구라 해도 예고 없이 찾아온 짝사랑을 털어놓는 건 대차지 못한 경서에게는 역시 무리였다. '“잠깐만! 짧게 얘기하고 끝낼 테니까 집중 좀 해줘.”'도깨비 시장이라도 선 듯 웅성대며 어수선하던 교실 분위기가 조금씩 침착해졌다. 반 아이들 모두가 교탁 앞에 서서 안내문 뭉치를 차곡차곡 챙겨내는 명우를 주시했다. 경서도 덩달아 명우의 반듯한 이마를 쳐다보았다.'명우는 그런 아이였다. 언뜻 보면 고리타분한 모범생 같이 생겼다. 훤칠한 키에 군살 없는 체격, 또래 남자아이들에 비해 여드름 하나 없는 피부는 유난히 돋보였다. 맵시 있게 자리한 눈 코 입은 교내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데 모으는, 그야말로 무기였다. 거기다 성적도 교내 다섯 손가락 안에 꼭꼭 꼽혀 명문대 진학자 리스트 상위를 차지했으니 그만하면 순정만화의 주인공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무게를 잔뜩 잡는다거나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스타일은 절대 못 되었다. 오히려 웬만한 악동 못지않게 활발하고 거침없는 성격이라 어쩌면 학급임원에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큰 소리 내지 않으면서도 좌중을 휘어잡는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사시사철 까불어대기는 하지만 어느 순간 진지한 음성을 내면 의아해서라도 지켜보기 마련이라는 걸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쉽게 말해 명우는 사람 다루는 요령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내가 더 한심하다는 거지.’'경서는 속으로 씁쓸한 중얼거림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