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그리움으로 그의 어깨에 기대 앉아 있던 나를 깨운 것은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그였다. 눈에는 뭔지 알 수 없는 습한 기운이 가득하고, 두 손은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떨고 있으면서도 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벌떡 일어서 내 앞으로 와 손을 내밀고 서 있었다.'“5시야. 이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그래. 그래야겠지.”'“가자. 내가 바래다줄게.”'“그래.”'나에게 내민 손을 잡으며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역 광장의 분수대가 자꾸만 돌아다 보였다. 오색찬란한 색깔들로 옷을 입은 물줄기들이 시원하게 하늘로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하며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 넘쳤지만, 내 눈에는 추운 겨울날. 날 남겨두고 신병교육대로 입소하기 위해 짧게 자른 머리와 아쉬움이 가득한 미소로 분수대에 빠뜨려진 채 웃고 있던 그의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부산역 안에는 이른 새벽, 그들만의 목적들을 가지고 떠나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잠깐의 헤어짐도 아쉬운 듯 서로의 곁에 다가앉아 끝없이 얘기를 주고받으며 다가올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그에게 작별을 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음에 마음을 다잡았다. 남겨질 그를 위해 내 마음을 숨기고 그에게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게 해야 할 의무가 내게 남아 있었다.'“선배 이제 정말 다시는 선배에게 오지 않을 거야.”'“그래.”'“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 기다리고 있지 마.”'“그래.”'“나, 더 이상 선배 원망하지 않아. 아니 처음부터 선배 원망한 적 없었어. 그냥 너무 아픈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잊은 척 하고 살았을 뿐이었어. 그런데 나, 오늘 중요한 약속 있다고 했었지? 기억나?”'“응.”'“뭔지 알고 싶지 않아?”'“…….”'“나, 결혼 할 거야. 정진우 차장검사와. 그 사람 아버지가 서울검찰청장이라는 것 알고 있지? 내게 많은 도움이 되어 주실 거야. 그래서 난 놓치고 싶지 않아. 그래, 내가 그 사람 사랑하는 것은 아니란 것 인정할게. 어쩌면 내가 사랑했던 남자는 선배뿐인지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우린 알고 있잖아. 사랑만이 결혼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그러니까 행여 내가 오기를 바라며 그 집에서 기다리고 있지 말라고. 난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데 선배는 여전히 그 집을 지키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내가 행복 할 수 없을 것 같아. 선배가 원하는 것이 내가 불행해 지는 것은 아니잖아?”'“그래. 알았어. 기다리고 있지 않을게. 그러니 마음 쓰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믿어도 돼?”'“그래.”'“정말이지?”'“그래.”'“그럼 나 믿고 간다. 잘 있어. 행복하고. 그리고 이건 돌려줄게.”'“뭐야?”'“선배가 10년 전 내게 준 선물.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다아시와 리지처럼 우리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들처럼 우리는 맺어질 수 없나봐. 선배는 분명 왕자인데 난 선배의 신데렐라가 아니었던 것 같아. 이제 돌려줄게. 미안해. 선배의 신데렐라가 되어주지 못해서.”'“아냐. 내가 미안해. 너를 행복한 신데렐라로 만들어 주지 못해서.”'그에게 잡힌 내손을 빼내려 할 때였다. 그가 내 손을 확 끌어당겨 자신의 품안에 가두었다. 그리고 말없이 한동안 나를 끌어안고 내 등을 다독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서 내 몸을 떼어 내 주었다. 잡고 있던 손도 놓아주었다. '새벽공기가 그와 나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고, 그의 손에 잡혀 있던 내 손이 공기와 마주하고 섰을 때, 그제야 정말 내가 그와 다시 헤어지려 한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이 그와 나의 마지막이고 그를 기억할 마지막 날이었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것이 이런 것인지. 한걸음 물러서려 걸음을 떼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을 한껏 베어 물었다. '사랑하는 내 남자였다.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내 마음속에서 내어 놓지 (못한) 나만의 남자였다. 내 인생의 반 이상을 그만 생각하며 보낸, 내 남자를 이제 완전히 내어 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아팠다. '그가 놀라서인지 밀쳐내지도, 끌어안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겨우 그의 입술을 놓고 그에게서 돌아섰다. 이제 정말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한 나를 그의 팔이 나의 가슴 앞으로 뛰쳐나와 와락 그에게 다시 안기고 말았다. 내목에 얼굴을 묻고 여린 살갗에 입술을 누르며 그가 울먹이고 있었다. 그이 심장이 내 등 뒤에서 고통스럽게 뛰고 있었다.'“사랑한다. 정수야. 네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구의 여자가 되어도 내게 여자는 너 뿐이다. 널 만나게 해 준 신을 원망하지 않을게. 너를 내게 영원히 주시지는 않았지만 너의 아름답던 시절을 내게 주셨던 것에 감사할게. 행복해라. 내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정말 행복해라.”'그의 흐느낌이 나를 때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지만 그와 난 그저 멈춰버린 시간 속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서 있기만 했다. 그의 손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그의 입술이 내 목 언저리에서 떠났을 때도 난 그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돌아보지 않고 그저 묵묵히 개찰구로 걸어 나갔다. '내가 떠난 그 자리에 그가 홀로 서서 얼마나 오랜 시간 서 있었는지 난 알 수 없었다. 부산발 서울행 KTX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10년 만에 돌아온 부산을, 내가 사랑하는 남자 이동은을 두고 난 그렇게 다시 서울로 향했다. 이 길로 영원히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절대 그에게 내 아픔을 보여 줄 수 없었기에, 또다시 나로 인해 그가 아파하게 할 수 없었기에 그를 두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