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 훌륭한 성적으로 고강을 마친 휼은 세자시강원을 빠져나오며 영의정[世子師傅] 박한성 대감과 이번 고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빠져나왔다.'“저번보단 조금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대감.”'“하하 그러셨습니까? 허나, 저번 고강 때보다 더 뛰어난 실력이셨습니다. 저하께서 나날이 장성하시니 곧 있으면 제가 가르칠 것이 없을 것 같사옵니다.” '“과찬이십니다. 허나 저번 고강 때와는 조금 다르긴 하지요.”'휼은 그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한쪽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기운이 자신과 함께 했으니 다른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걸음을 함께 하던 박 대감이 잠시 제자리에 멈추더니 휼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저하, 소인은 집현전에 따로 볼 일이 있어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아, 그렇게 하세요. 다음 조강[朝講]때 뵙도록 하지요.”'“예, 저하.”'그렇게 박 대감이 사라지자 정 내관은 휼에게 다가와 동궁 쪽으로 모시려 했지만 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잠시 생각을 하다 피식 웃으며 방향을 틀었다.'“휘빈궁으로 갈 것이네. 고강의 결과를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주 귀한 선물로 인해 더 술술 풀린 것 같으니 그에 대한 보답을 주어야지.”'하지만 휼은 휘빈궁에서 혜월을 만날 수 없었다.'“빈궁이 없다니. 허면 어디 있는 것이냐?”'분명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는지라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혜월의 밝은 미소를 보며 잘했다는 칭찬 한마디를 듣고 싶었는데. 하지만 휘빈궁 나인이 내뱉은 말은 뜻밖이었다.'“빈궁마마께오선 지금 자월당에 납셔계시옵니다. 저하.”'“자월당이라니. 허면, 화의에게 갔다는 것이냐?”'“그러하옵니다. 저하.”'소화와 혜월이 무척이나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소식은 간간히 정 내관에게서 들었다. 저번 청국 진상품에 대한 사건도 소화가 큰 힘이 되어 주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휼은 소화가 어떤 선택을 하였는지 알고 있었다. 원의와 달리 소화는 마음만 먹는다면 세자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소화는 그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와 척을 두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렇기에 휼은 마음의 정인으로 혜월을 선택하였다 해도 소화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짙은 이기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서 소화가 웃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었다.'혜월은 소화의 처소에서 그녀가 대접해준 다과상을 나누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게 배려가 담긴 냉차가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냉차의 서늘함을 온몸으로 느끼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소화를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깊이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저번 일을 사과하기 위해서 이렇게 왔다네. 화의.”'“저번 일이라면?”'소화는 처음으로 심하게 흐트러졌던 혜월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었다.'“아니옵니다. 빈궁마마. 그런 일에 마음 쓰지 마시옵소서.” '“아닐세. 어떤 일이든 확실하게 짚고 사과할 건 사과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혜월은 다시금 냉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어느새 서늘했던 기운이 점점 가라앉아가기 시작했다. 소화는 차분한 눈빛으로 혜월을 바라보았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의 그 불안한 모습은 결코 보이지 않았다. 항상 당당하며 오만한 듯 보이지만 그것에 틀린 점이 없이 곧았다. 어느새 소화는 그러한 혜월에게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빈궁마마의 아버님께서는 도자기공이라 들었사옵니다.” '“아, 그렇지.”'소화의 한마디에 혜월의 머릿속에 또다시 조각조각 파편으로 민윤식에 대한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헌데, 화의께선 그것을 어찌 아는 것인가?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으로썬 조심스러운 일인데 말이야.” '“전 빈궁마마의 아버님께서 꼭 누명을 벗으리라 믿사옵니다. 우연히 그 분이 만들었던 도자기를 본 적이 있었사옵니다. 아주 작은 찻잔이었지만 그 속엔 정말 꽃잎이 휘날리듯 아름다운 매화가 휘늘어지고 있었지요. 그림도 그림이었지만 도자기의 선과 빛이 참으로 고았던 것으로 기억하옵니다.”'“그림은, 아마 고모님께서 그렸을 테야.”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혜월의 고모인 혜아는 참으로 섬세한 붓질로 제법 부드러운 그림 선을 나타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없었고 그림 역시 해당됐다. 하지만 혜아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가끔 윤식이 만드는 도자기에 문양을 그리는 것으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달래곤 했다.'“어릴 적, 아버님을 따라 도예촌을 간 적이 있었사옵니다. 거기서 한 도자기공이 어린 제게 말했지요. 도자기를 잘 만드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은 없다고요 사심이 들어간 도자기는 결코 반듯하게 구워지지 않는다고 하였사옵니다. 금이 가기 마련이라고요. 빈궁마마의 아버님께서 만드신 도자기엔 결코, 어떠한 사심도 들어 있지 않았사옵니다.” '“어째서 갑자기 아버님의 말씀을 하는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절대로 무너지지 마시옵소서. 빈궁마마.” '참으로 의미심장한 한마디였다.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 소화도 뭔가를 짐작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민윤식의 대역죄. 분명 그 속에 낙빈이 엮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밝히면 낙빈, 그녀의 숨통을 확실히 조일 수 있는 무언가가 나올 터, 그렇기에 그녀는 원의를 그런 식으로 내몰면서까지 민윤식에 대한 사건을 덮으려고 했을 것이다.'“자네는 참 강한 것 같네. 예전 어마마마께서도 내게 그리 말했었지.”'“아니요. 소첩은 강하지 않사옵니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 나약할지도 모르옵니다.” '소화는 애잔한 눈빛으로 서서히 흔들리는 냉차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강하지 않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흔들리고 있으니까. 여인의 마음을 좀처럼 쉽사리 버리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니 말이다. 그렇기에 애써 남들에게 강하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스스로에게 암시를 거는 걸지도 모른다. ‘너는 강하니 결코 흔들려선 안 된다.’ 이렇게……. '아직,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소화의 사랑도 사랑이라고 혜월은 조금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조금 뒤에서 지켜보는 사랑도 사랑이라고.'‘그렇다면 은륜, 너 역시 그런 거였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떠난 거니? 무엇이 나를 위험하게 할까봐. 더 슬퍼하게 할까봐. 도대체 무엇이.’''참으로 무더운 여름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살이 타들어갈듯 이글 되는 태양 속에 점차 하지[夏至]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몇 달째 비가 내리지 않은 가뭄이 이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도성은 물론이요 그 밖으로도 기근이 심해져 한조는 다급하게 편전회의를 소집하였다.'“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이 점점 늘고 있사옵니다. 전하.”'“일단 풍저창에 명해 활인서에 곡물을 풀도록 하고 그 외에도 구휼정책에 아낌이 없어야 할 것이요.” '“하오나 전하,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할 것이옵니다. 이대로 계속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기근은 더욱 심해질 것이옵니다.” '예전에도 가뭄으로 인하여 기근이 이어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하지 때가 되기 전엔 끝이 나곤 했다. 하지만 이번 가뭄은 그때와 달리 더 길어질 것 같으니. 한조는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숙인 좌상에게 말했다.'“허면, 무슨 방법이 있는 것이요?”'“기우제[祈雨祭]를 드리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이번 가뭄은 아무리 봐도 예사로운 가뭄이 아닌 듯싶사옵니다.” '기우제. 한조는 그러한 미신을 믿지 않았지만 백성들은 달랐다. 그로 인해 조금이나마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일단 고려해보도록 하지.”''소화는 혜월을 배웅하면서 짙푸르게 늘어진 녹음이 뒤섞인 풍경과 더불어 마치 유리조각처럼 따갑지만 반짝이며 쏟아지는 찬란한 햇빛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여기며 미소를 머금었다.'“무덥기는 하지만 그보다 눈을 시원하게 하는 계절입니다.” '“하긴, 그렇긴 하지. 여름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니 말이야.” '혜월은 무척이나 쾌청하게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여유를 흘렸다. 소화의 배웅을 받고서 휘빈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미리 마중을 나온 나인이 다소 다급한 표정으로 한 상궁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였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아한 눈짓을 주는 혜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무슨 일인가?” '“세자저하께서 휘빈궁에 납셔 계시다 하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고강을 마치는 날이다. 아마 생각처럼 좋은 성적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것을 자신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던 걸까? 휼에 대해 알아가고 점점 깊어지면서 첫 만남 때의 그 차가움보다 그 안에 부드러움과 조금은 어린 애 같은 모습을 발견하면서 혜월은 그 점이 즐거웠고 더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처소 안으로 빠르게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나인이 후원에 계신다며 그녀를 그쪽으로 안내했고 그곳 작은 못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혜월은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그에게 다가갔지만 그는 짐짓 모른 척을 하며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어인 일로 오신 것이옵니까?”'“어인 일이 아니면 이곳에 오면 아니 되는 것이요?” '“허나, 어인 일이 아니면 오실 이유가 없지 않사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