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도 까만 어둠이 조선의 동궁 아래로 은밀히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조선의 국본이자 세자가 지내는 곳이건만 이상할 만큼 주변을 지키는 이들이 없었다. 그때, 고요한 적막을 깨고 타박타박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까만 어둠속에 가려진 한 사내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내는 잠시 주변을 살피다 이내 어느 한 곳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고개를 숙인 방향으로 또 다른 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찬란히 흐르는 은빛 머리칼에 매섭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하지만 순식간에 구름 속에 자취를 감추듯 남자는 어둠 속에서 단 한마디를 내뱉었다.'“너의 감정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될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네 인연에 대한 기억이 모두 망가질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그러길 바랍니다.” '“훗, 모든 것을 걸었다는 건가. 좋은 마음가짐이로군.”'사내는 한 손을 들어 고개를 숙인 사내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아직은 미세하게만 느껴지는 이 기운을, 언젠가 자신이 모두 손에 넣게 될 것이다. 이윽고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두 명의 사내의 얼굴이 얼핏 스치더니 이내 신비롭게 흐르던 은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또다시 고요한 바람이 스치고 홀로 남겨진 사내는 단호한 시선으로 솟아오른 보름달을 바라보며 속삭였다.'“제 인연은, 아마 엉키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처럼 저도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결코 그녀를 잊지 않고 이번엔 제 인연 앞에 당당해질 수 있도록 꼭,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월하노인의 붉은 실. 그것은 운명과 연을 맺어주는 인연. 하지만 인연은 함께 만드는 것이지 결코, 홀로 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청천벽력 (靑天霹靂)]''중국풍의 화려하고 사치스런 집들 사이로 묘한 향내를 풍기는 연기가 자욱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치 도화 경처럼 깎아내리는 절벽 사이로 신비스럽게 흐르는 폭포수와 갖가지 이름 모를 꽃들이 한껏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동양화를 담아낸다.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턱없이 모자를 정도로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이곳은 수신[水神] 하백이 살고 있는 수국[水國]이었다. 평소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하백의 성품으로 수국에서 시끄러운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러한 고요함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오라버니! 여기 계신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빨리 나오세요. 오라버니!” '“수휘 아씨, 여기서 이렇게 소란을 떠시면 곤란합니다!” '“곤란은 얼어 죽을, 당장 나오라고 해 오라버니! 안 나오면 이 수휘가 죽는 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수국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소리를 질러대는 그녀는 하백의 하나뿐인 여동생 수휘였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칠흑의 탐스러운 머리칼과 투명할 정도로 맑고 깨끗한 피부 위로 깊게 내려앉은 까만 눈동자, 모란 잎을 머금은 듯 붉게 그려진 입술 선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청초하여 천계의 뭇 사내들 마음을 뒤흔들었지만 외모와는 달리 성격은 불과 같고 매사에 기죽는 일이 없는 그녀는 당당하다 못해 도도하고 오만하기까지 한 여인이었다.'“훗, 정녕 이 수휘가 이곳에서 죽는 꼴을 보고 싶으신가 보군요, 좋습니다. 죽어서도 오라버니를 결코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그때, 자욱하게 퍼져있던 연기가 서서히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서늘한 기운이 삽시간에 수국 전체를 휘어 감싸기 시작했다. 수휘의 옆에서 그녀를 말리던 유모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고 수휘는 보란 듯이 고개를 들고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겉옷이 거의 벗겨지다시피 한 흐트러진 매무새와 자다 깨어난 듯 거슴츠레한 눈초리, 하지만 온몸에서 흐르는 수기는 그가 하백이라는 사실을 어김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게 소리친다고 수국이 무너지겠느냐 사랑스런 누이야.”'“꼴을 보니 말 안 해도 알겠네요. 하여튼 남자들은 전부 다 똑같습니다.” '하백은 수휘의 말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땅에 닿을 듯한 푸른빛의 머리칼이 쏟아져 내려온다. 서늘하고도 몽환적인 물빛 눈동자에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가늘고 고운 선으로 참으로 위험한 향을 내뿜고 있었다.'“무엇 때문에 그리 골이 난 것이냐.”'“몰라서 물으십니까? 오늘 저에게 도착한 서신에 대해서 정녕 모르신단 말이지요?” '“그래, 모르겠구나.” '하지만 수휘는 하백의 이마에서 한 두 방울 맺히기 시작한 땀방울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선 결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하백이다. 그녀는 잔인한 미소를 그리며 소리쳤다.'“정녕 제가 죽는 것을 보고 싶으신가 봅니다, 오라버니.”'“수, 수휘야 그렇게 극적인 협박은 하지 말거라.”'“협박이 아닙니다! 지금 전 정말로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오늘 아침 일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그녀를 반긴 것은 천궁에서 내려온 불길한 서신 하나,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이런 서신이 내려온 적이 없었던 터라 수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열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혼인이라니요 그것도 그 망나니 천자랑 혼인이라니!” '옥황상제의 외동아들인 천자 ‘비사란’의 반려로 간택되었다는 서신, 그것도 상제폐하께서 직접 옥쇄까지 찍어서 내려 보내 주셨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도 온갖 해괴한 소문으로 둘러싸인 망나니라 불리는 천자와는 절대로 할 수 없다. 절대로!'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토록 심하게 반발하는 자신의 누이를 보며 하백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수휘에게 다가와 다정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수휘에겐 택도 없는 눈빛에 불과했다.'“사랑스런 누이야 좋게 생각 하자꾸나, 네가 천자와 혼인만 한다면 장차 너는 상제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넌 천녀들의 머리 위에 강림할 수 있는 거야.”'다소 직접적이면서도 불순한 동기의 유혹이긴 했지만 그 어디서든 최고이기를 바라는 수휘에게 이 같이 좋은 동기부여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흔들릴 수휘가 아니었다.'“남자의 힘을 빌려 꼭대기에 올라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것도 그런 망나니 자식과는 단 일분일초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아요. 절대로! 자, 오라버니 선택하십시오.” '“선택이라니?” '“저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두실 건가요. 아님 살려주실 건가요.” '“하지만…….”'“하지만은 없습니다. 당장 택하셔요. 오라버니!” '그녀의 눈동자엔 이것이 결코 허투로 하는 말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하백은 그야말로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그 어떤 일이 생겨도 상관없는 것이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자와 혼인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든 상관없냐는 말이다.” '“당연하지요!” '역시나 자신을 선택할 줄 알았다면서 반짝이는 눈동자로 하백을 올려다보는 수휘를 또다시 근심 어리게 바라보다 이내 그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아무리 망나니라고 하더라도 천자이신 귀한 분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다. 그리고 쉬운 방법으론 피할 수도 없겠지. 그러니 인간계로 가거라.” '“인간계?” '“그래, 그곳에서 너의 모든 능력을 거두고 인간으로 숨어 지내거라.”'인간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 오직 심부름꾼인 항아들이나 오가는 곳으로 천인들이 함부로 갈 수는 없는 곳이었다. 그러한 곳에 자신의 모든 능력을 버리고 인간으로 살아가라?'“진심이십니까?” '“지금 농을 할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지 않느냐.”'그래, 농은 절대로 아닌 듯하다. 오라버니는 진심인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하고많은 여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왜 자신을 택하였단 말인가! 물론 이 천계에서 자신보다 빼어난 외모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여인도 없기는 하지만. 망나니 주제에 보는 눈은 높아가지고!'“미인은 박명할 팔자라더니.”'“어찌하겠느냐.”'수휘는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만수무강 하십시오.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