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품이 연속으로 세 번 나오더니 결국 한쪽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은준은 물통을 들지 않은 손으로 대충 눈물을 훔쳐 내곤 크게 기지개를 켰다.'사방에서 요란스럽게 지저대는 산새 소리와 졸졸거리는 계곡물 소리가 몽롱한 그녀의 머리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또다시 입이 찢어져라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말았다.''새벽 3시쯤 겨우 잠자리에 들었던 은준은 대포 소리보다도 커다란 아버지의 고함에 어쩔 수 없이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머리맡을 더듬어 시계를 찾아 확인해 보니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맙소사!’'은준의 무겁디무거운 눈꺼풀은 곧바로 눈동자를 덮으며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셋 셀 동안 일어나지 않으면 오늘 당장 기사 불러서 인터넷 끊어 버리고 노트북도 압수다. 그리고 네 고모 공장에 전화해서 자리 알아보라고 할 테니 알아서 해!』'아버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윙윙거리며 들려오긴 했으나, 잠든 지 채 네 시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쉽게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하나!』'은준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손만 들어 허우적거리며 아버지를 불렀다.'『아, 아빠.』'『둘!』'허우적거리던 은준의 팔 동작이 훨씬 더 커졌다.'『아, 아버지!』'『셋!』'후다닥! '평소 아버지의 불같은 성정을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는 바람에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쏠리는 것 같은 심각한 빈혈증세가 밀려왔으나 그런 것쯤은 참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잠깐의 어지러움을 참는 대가로 무참히 잘렸을 랜 선은 살렸으니까.'『가위는 내려놓고 말씀하세요. 아침부터 무섭잖아요.』'주방에서 곧바로 나온 듯, 아버지의 손에는 날이 두꺼운 가위가 벌어졌다 접혔다를 반복하며 은준을 위협했다.'『지금이 아침이란 사실은 알고 있는 게냐? 내가 어제 분명히 경고했지? 네 생활 태도를 스스로 바꾸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바꾸게 한다고 말이다.』'덮이는 눈꺼풀을 주체하지 못하고 은준이 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생활 패턴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꿔요? 저에게 시간을 좀 주시면…….』'『시끄러! 식구라곤 달랑 둘밖에 없는데 매일 아침 혼자 밥 먹는 게 좋은 줄 알아? 너한테 밥하란 소린 안 할 테니 나가서 물이나 떠 와!』'『정수기 있잖아요.』'『국형사(國亨寺) 올라가서 떠 와! 앞으론 아침에 네가 떠 온 물만 마실 테니 그렇게 알아! 얼른 일어나지 못해!』'은준이 마지못해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서다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차라리 결혼을 하시면 좀 좋아. 하긴, 누가 아빠처럼 쫀쫀한 남자를 좋다고 하겠어.』'방 밖으로 나가던 아버지의 묵직한 음성이 그녀를 위협했다.'『앞으로 온라인게임 절대 금지!』'『취, 취소! 아빠! 농담이에요. 아, 아시면서……. 제발 그것만은!』'은준은 아버지에게 달려가 온갖 아양을 떤 뒤에야 겨우 온라인게임을 사수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세탁하려고 구석에 던져 놨던 트레이닝복을 다시 주워 입고 마구 뻗친 짧은 커트 머리를 감추기 위해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는 아버지가 미리 준비해 둔 물통을 집어 들고 집 밖으로 나서야 했다.''강원도 원주. 서울에서 1시간 3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도착할 수 있는 중소도시. 서울과 가까워 많이 산업화된 도시이지만 강원도답게 아름다운 자연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곳이기도 하다.'원주 근교의 치악산자락……. 은준이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이곳은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토속음식점들이 모여 있어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도 잘 알려진 ‘황골’이라는 동네였다. '말이 산 밑이지, 원주 시내에서 버스로 20분 거리도 안 되는 곳이기에 특별한 날이 아닌 평일에도 그곳은 늘 맑은 공기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전원주택이 뭐가 좋다고 뜬금없이 이사를 오냐고요! 뛰어놀 애들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정원은 또 왜 그리 넓은지.’'은준은 자꾸 새어 나오는 하품 탓에 줄줄 흐르는 눈물을 이젠 귀찮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어슬렁거리며 산길을 걸어 올랐다.'‘아버지! 저는 저혈압이라 아침이 쥐약이란 말이에요! 정녕 딸내미를 말려 죽이실 참이십니까! 잠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단 말입니다!’''-그러니까 밤에 자란 말이다! ''어디선가 아버지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빠릿빠릿한 걸음으로 걸으면 10분 만에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은준은 세월아 네월아 거의 20분 만에 목적지인 국형사 옆의 약수터 근처에 도착했다.'국형사는 치악산 등산로의 입구에 있는 작은 사찰인데, 물을 뜨려면 산줄기의 계곡 옆에 붙어 있는 경사가 꽤 가파른 자갈길을 내려가야만 했다.'은준은 아무 생각 없이 걸어오던 껄렁한 포즈로 경사진 길을 내려서다 아침이슬에 젖어 있던 매끄러운 자갈에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우왓!” '쿵!'몸이 붕 하고 뜨는 것이 느껴지더니 곧이어 둔탁한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은준은 아픔 대신 온몸이 나른해지며 땅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아, 이대로 자고 싶다. 푹…….’'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다급히 불렀지만, 은준은 이미 정신을 잃은 뒤였다. ''* *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산길을 오르는 상연의 얼굴엔 자괴감으로 얼룩진 쓴웃음이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괴로웠던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을 보면 인간은 참으로 이기적이고 독한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라고 싸잡을 필요까지 있을까? 조상연 네놈이 독한 거겠지.’'많이 좋아지긴 했으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쿡쿡 찌르는 것 같은 편두통은 어김없이 그를 괴롭혔다.'원주로 이사를 한 그다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눈을 뜨면 등산로를 찾았다. 의무처럼 아침 산책을 한 지도 그렇게 어언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산속 어딘가에서 흐르고 있을 계곡물 소리, 산바람에 어우러지는 비릿한 풀냄새, 그리고 오랜 연륜을 느낄 수 있는 켜켜이 쌓인 부엽토의 푸근한 향취……. 자연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노랑을 띤 연둣빛 새싹에서 진초록의 무성한 잎으로 변신한 활엽수들을 바라보며 상연은 어느새 여름의 초입에 들어왔음을 실감했다.'계절의 변화를 즐기며 산길을 걷던 상연의 눈에 비틀거리는 한 소년의 뒷모습이 들어왔다.'165cm가 넘을락 말락 하는 작은 키에 뒷모습만 봐서는 꽤 마른 체형인 아이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꼬질꼬질한 트레이닝복에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중학생 정도?'‘자식, 꽤나 졸린 모양이군. 저 흐느적거리는 꼴 좀 보게. 가관이다, 가관이야.’'상연이 국형사를 지나칠 무렵, 소년은 물을 뜨러 가는 듯 계곡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더니 상연이 어찌해 볼 새도 없이 소년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찍 미끄러져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상연이 다급히 뛰어가 일으켜 안았지만 소년은 정신을 잃었는지 꿈쩍도 하질 않았다. 혹시 머리를 다쳤을지 몰라 흔들어 깨우지도 못하고 상연은 조심스레 그를 들쳐 업고는 산길을 되돌아 내려갔다.'‘휴대폰을 두고 왔으니 어쩐다……. 으, 골치 아프게 생겼네.’'상연의 고민을 전혀 알 리 없는 소년은 쌕쌕 고른 숨소리를 내며 넓고 따뜻한 그의 등에 업혀 세상모르게 잠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