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지? 아니지!” '“도대체 무슨 말이야?” '“이거, 이거 말이야. 이거 네가 쓴 거 아니지?”'그의 손에서 난폭하게 흔들리는 A4 용지는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버렸는지 아니면 어디에 보관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있던, 내가 쓴 리포트였다. 그를 유혹하기 위해 예전에 작성해둔 나의 은밀한, 아니 바보 같은 리포트 말이다. '그 종이쪼가리를 보는 순간, 내 심장은 퉁! 퉁! 하며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급격하게 쓸려 내려가는 혈류의 물살 때문에 귀에서 윙윙거리는 이명이 울리더니 이내 현기증이 왔다. 나는 사막의 모래처럼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후 마지막 물 한 방울을 얻기 위해 선인장을 쥐어짜듯 힘겹게 물었다.'“그, 그거, 그거 어디서 났어?” '“제발, 제발 아니라고 말해봐. 네가 쓴 게 아니라고, 응?” '그는 내 물음에 답하는 대신 양쪽 팔을 꽉 움켜쥐며 다그쳤다. '“…….”'나는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수긍도 부인도 하지 않자 그의 눈동자는 실망으로 가라앉았다. '“순이야, 내가, 내가 생각하는 거, 그거 틀린 거라고 한마디만 해봐. 우리 집에 돈이 많으니까 너도 다른 사람처럼 나를 장난삼아 유혹해보려고 했던 거 아니라고, 그 한마디만 해봐. 응?” '내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내 양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거세게 흔들었다. '“뭐라고, 뭐라고 말 좀 해봐. 순이야, 제발 말해. 아니라고. 응? 아니라고…….”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지푸라기 인형처럼 흔들렸다. 나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끝까지 그를 우롱하고 싶지는 않았다. '“흑…….”'억눌린 울음소리가 내 입에서 터져 나오자 그는 더 이상 나를 흔들기를 포기했다. 대신 간절한 마음을 담아 내 눈을 응시했다. 입으로 말할 수 없으면 눈으로라도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듯이 그렇게. 그러나 내가 차마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피하자, 그는 힘없이 내 팔을 내려놓았다. '“널 보면 흥분되고, 만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혼자 있으면 네 얼굴만 떠오르고, 잠자기 전에는 네가 나한테 했던 말 다 생각나고, 내가 그때 왜 너한테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했나 후회하고, 다음에 만나면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이런 게 사랑 맞지?” '독백조로 웅얼거리던 그는 다시 한 번 내 양팔을 움켜잡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말해봐! 그렇지? 그런 게 사랑이지? 그렇지? 흑, 순이야. 안 돼! 안 된다고! 내가 이렇게 널 사랑하는데, 넌 다른 계집애들처럼 우리 집 돈 때문에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니……. 이런 웃기는 경우가 어디 있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냐고!” '그가 팔에 피멍이 들 정도로 잡고 거칠게 흔들어도 나는 아프지 않았다. 차라리 그가 나를 때렸으면 했다. 어서 그 큰손을 들어 내 뺨을 세차게 후려치고, 발에 힘을 주어 내 배를 흠씬 걷어찼으면 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길거리를 질질 끌고 다녀야 했다. 그래야 내가 지었던 죄가 씻겨 나갈지 모르니까. 그래야 시간을 뒤로 되돌릴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야 내가 한 짓 때문에 그가 덜 아플지도 모르니까. '“널 유혹하려고 계획적으로 그랬던 건 사실이야. 그렇지만, 믿지 않겠지만, 난…….” '“그만! 그만해!” '그는 내 팔을 놓고 귀를 막았다. 그리고 울었다. 남자가 흘리는 한 줄기 눈물은 여자가 흘리는 강물 같은 눈물보다 슬프고 아팠다. 그의 뺨에서 천천히 흘러내리는 한 줄기 눈물은 날카로운 갈고리가 되어 내 심장을 내리찍어 피를 냈다.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다니, 나쁜 년! 넌 정말 나쁜 년이야. 지옥에 떨어져도 지옥에서조차 받아주지 않을 만큼 나쁜 년이라고!” '그는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듯 치를 떨면서 잡고 있던 내 양팔을 놓고는 멀찌감치 물러섰다. '“너 때문에 나는 평생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겠지? 너처럼 순진한 얼굴을 하고 고고한 척 구는 인간들을 보면 구역질이 나겠지? 넌, 나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이제 그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두 손을 불끈 쥐고 바닥을 노려보며 흥분을 잠재우고는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너, 앞으로 우연이라도 내 눈에 띄지 마. 그때는 널 짓이겨놓을 테니까. 조심해! 밤길 걸을 때도 내 생각하면서 걸어. 언제 네 등을 찌를지도 모르니까.”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바닥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있는 나를 그가 마지막으로 힐끗 눈에 담았다. 그리고 술 취한 사람마냥 비틀거리며 방을 나갔다. '나는 그를 잡지 않았다. 그저 멀어지는 그를 멍하니 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소리에도 그저 뒷걸음질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나이가 들었더라면, 조금만 더 자의식이 약했더라면,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뒷걸음치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세상 경험을 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더라면, 자의식이 강하다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리고 자존심과 자만심을 구별할 만큼 현명했더라면 나는 그에게 떠나지 말라고 매달렸을 것이다. 매달리는 나를 설령 그가 발로 차고 짓밟으며 떼어내려 한다 해도 그의 발목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원한다면 석고대죄를 하는 한이 있어도 그에게 용서해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목이 쉬어 터질 때까지 소리치며 이해해달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제발 내 실수를 용서해달라고 그에게 간청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 나는 어렸고, 자의식은 쓸모없이 강했고, 자존심은 자만심이라고 불릴 만큼 하늘을 찔렀고, 그가 내게 그렇게 큰 의미를 지녔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기에, 나는 그가 떠난 후에도 그저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