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갈아입을 의복이 준비되지 않아 은휘보다 조금 늦게 목욕을 마치고 나온 가윤은 이미 자시가 넘어 날이 바뀌었는데도 은휘의 집무실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늘 그랬지만, 그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자신의 몸이 이리 곤한데 여인인 은휘야 말해 무엇 하겠느냐마는 이 늦은 시간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집무실에서 버티고 있는 그녀가 미련스럽게 느껴져 괜스레 화가 났다. '“늘 이 시간까지 집무를 보는가?”'책상 위에 잔뜩 놓여 있는 서류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은휘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인기척에 놀라 순간적으로 옆에 놓여 있던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윤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다시 검을 내려놓았다.'“아…….”'한숨 같은 신음을 흘리며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가윤이 피식 웃었다.'“오늘 일로 예민해져 있었나 보군.”'맞는 말이었다. 장시간 살의(殺意)에 노출되어 있었던 탓에 예민해진 그녀의 감각은 쉽사리 무뎌지질 않았다. 손에 직접 피를 묻힌 것도 오랜만이라 온몸을 집어삼킨 피로감에도 쉽사리 잠이 청해지질 않아 결국 집무실로 향한 그녀였다. '“……송구합니다.”'피곤한 탓인지 조금 갈라져 나오는 그녀의 음성에 가윤이 웃음을 거두고 인상을 그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바라보니 희미한 불빛에도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을 만큼 은휘는 지친 모습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단에 도착하자마자 상처부터 치료하라는 가윤의 닦달에 뺨의 긁힌 상처는 제대로 치료받아 실같이 붉은 선만을 남겨 놓았다는 점이었다. '“가서 눕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조용한 그의 음성에는 단호한 면이 있어서, 그것은 권유라기보다는 차라리 명령조에 가까웠다. 그것이 그 나름의 걱정인 것을 모르지 않기에 은휘는 그런 그에게 하얗게 웃어 보였다. 그것이 또 안쓰러워서, 가윤의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진득하게 묻어났다.'“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말라 내게 말했던 것을 그대로 되돌려주지.”'가윤의 서늘한 손가락이 그녀의 이마에 흩어져 있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이마를 스쳤다. 그리고 그 감각이 예민해져 있던 그녀의 신경을 진정시켰다. 그의 손은 섬섬옥수(纖纖玉手)라고 할 만큼 수려하지는 않았지만, 은휘는 크고 투박한, 마디마디 잔뼈가 굵은 가윤의 손이 좋았다. '“나리께서도 어찌 쉬지 않으시고 이러고 계십니까.”'“아마도 그대와 같은 이유겠지.”'생각할 것이 많은 것은 그나 은휘나 매한가지였다. 그녀에게 향했던 손길을 거두지 않은 채 책상에 걸터앉아 창밖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리…….”'안타까운 은휘의 음성에 가윤이 고개를 돌려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대만큼은, 날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군.”'“무슨…….”'뜬금없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하여 되묻는 은휘에게 가윤이 짐짓 딴 소리를 했다.'“알고 있소? 내 이름은…… 나의 모친이 지어 주신 이름이라는 것을.”'“…….”'“아름다운 분이셨소. 그리고 그만큼…… 여린 분이셨지.”'여리고 여려서 슬펐던 분. 끝내 홀로 서지는 못했던 분. 가윤의 눈빛이 아련해졌다.'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그의 말투에서 은휘는 그가 털어놓지 못할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아마도 그의 모친이라는 분은…… 그에게 있어서 아픈 사람일 것이다.'“그래서 나에게 내 이름 석 자는, 조금 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소.”'가윤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그의 손이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닳을까 무서워 차마 마음껏 취하지도 못했던 그녀의 입술. 가윤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손가락을 통해 뜨거움이 느껴졌다.'“그대가 이 입으로, 내 이름을 불러 주었으면 좋겠어.”'차마 안 된다 쳐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먼저 그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던 그 어느 날의 달밤처럼,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바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여서. 문득 계월향의 충고가 생각났다. '마음이 닿았다면, 망설이지 마십시오. 인력(人力)으로 끊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그녀는 가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의자에서 일어나 섰다. 책상에 걸터앉은 그와 눈높이를 맞추자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그와 마주한 그녀가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가윤의 눈동자도 점점 확장되었다.'“저는, 말로 하는 위로(慰勞)는 배우지 못했습니다.”'“…….”'“하지만…….”'은휘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넓은 어깨에 자신의 작은 머리를 기댔다. 자신에게 기대어오는 그녀의 향기에 놀란 가윤의 몸이 뻣뻣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이내 그의 입에서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곁눈으로 보이는 그녀의 귀며 목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렇게 다가가기까지 얼마나 용기를 쥐어짠 것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모습에, 그는 한기(寒氣)가 돌던 자신의 가슴이 훈훈하게 덥혀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그가 두 팔을 그녀의 허리에 둘러 깍지를 끼고 자신의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흠칫.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작은 몸에 가윤은 다시 한 번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은 그가 깊게 숨을 들이쉬어 폐부(肺腑) 가득히 그녀의 향기를 머금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은휘가 무어라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가윤의 모든 신경이 멈추었다.'“……가윤…….”'자신의 귀를 간질이는 그 애처롭기까지 한 속삭임에, 그의 가슴이 더없는 환희(歡喜)로 물들었다. 마음으로부터 품은 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콤했다. 가윤은 은휘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더 단단히 그러안았다. 야심한 시각, 단 둘뿐인 공간에서 끌어안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불순(不純)하지도, 삿되지도 않았다. 그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의 온기를 맛본 사람들처럼,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각자의 가슴에 그득 담아 둘 뿐이었다.'그의 품에 안겨 있던 은휘가 작은 숨을 내뱉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곤두서 있던 온몸의 신경들이 제각각 긴장을 내려놓는 것이 느껴졌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자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눈에 힘을 주어 깜빡여 봐도, 천천히 덮여오는 졸음의 무게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상태를 알아챈 가윤이 작게 웃더니, 은휘의 무릎 뒤에 손을 넣고 번쩍 안아 올려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자신의 몸이 허공에 뜨는 것을 느낀 은휘가 작게 무어라고 중얼거렸지만, 그가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머리를 굴려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잠이 쏟아졌다. 그녀를 탈진 직전까지 몰아붙인 긴 하루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든 탓인지, 아니면 그런 긴장 따위 가윤의 품 안에서는 필요치 않다고 느낀 탓인지, 그의 가슴에 기대어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있는 은휘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가윤은 한 손으로는 그녀를 품에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부드럽게 은휘의 등을 토닥였다. 규칙적인 그의 심장 소리와, 자신의 등을 쓸어주는 그의 손길이 은휘로 하여금 더 이상 쏟아지는 졸음에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윽고 은휘의 눈이 완전히 감기자, 가윤이 잠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창가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품 안에서 새근거리는 은휘의 숨소리가 그의 가슴을 간질였다. 품에 안은 그녀의 체온이 가윤의 가슴을 뻐근하도록 벅차게 만들었다.'소중하고 소중한 사람. 마냥 지켜주고만 싶은 그의 어린 정인(情人). 곤하게 잠든 은휘의 이마에 가윤이 살며시 입맞춤했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들릴 듯 말 듯 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은휘…….”'이윽고 바람이 불어와 희미하게 일렁이던 방 안의 촛불을 삼켜 버렸다. 두 남녀의 그림자도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