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수정이 퇴근하는 나를 맞이하기 위해 현관에 서 있었다.'“나 다녀왔어.” '“어서 오세요.”'“별일 없었지?”'“예.”'당연히 별일 없지.'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데 무슨 별일이 있겠는가?'방으로 들어가서 넥타이를 풀고 양복을 벗어 따라 들어온 아내에게 옷을 건네주자 그녀는 옷장에 걸고 편한 티셔츠와 바지를 건네주었다.'“저녁은 씻고 먹을까? 먹고 씻을까?”'“밥부터 먹어요.”'“반찬 맛있는 것 있어?”'“맛있는 것 없어요.”'“뭐 있어?”'“아침에 먹던 것.”'이거 참, 허무 개그도 아니고…….'아내는 저녁을 차리기 위해 안방을 나갔다.…'나는 안방을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저녁부터 먹으라는 것은 나의 허기진 배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밥을 먹고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뜻이다.'말하기 싫으니 말을 걸지 말라는 뜻도 되었다.'내가 주방에 들어가자 아내는 밥과 추어탕을 내 앞에 놔주었다.'“어 추어탕이네?”'“예.”'“와! 맛있겠다. 당신이 만들었어?”'“엄마.”'“장모님이 만든 거야? 오늘 방배동에 갔다 왔어? 바쁘신데 언제 이걸 만드셨대?”'“방학이잖아요.” '“그래도 방송 출연이며 강의며 바쁘실 텐데.”'“어서 드세요.”'장모님을 칭찬해도 아내는 좋다 싫다 별 말이 없다.'“어휴, 시원하다. 역시 장모님이야. 당신도 어서 장모님 솜씨 물려받아야 할 텐데 말이야.”'“예.”'아주 짧은 단답.'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조용히 밥이나 먹자는 아내의 표현이다. 그 후 우리의 식탁은 숟가락과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먼저 밥을 다 먹은 내가 밥그릇과 추어탕 그릇을 들고 싱크대에 가서 설거지를 한 후 주방을 나오자 곧 아내도 밥을 다 먹었는지 일어나 반찬통을 냉장고에 넣고 밥그릇과 국그릇을 씻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자기의 할 일만 묵묵히 하고 있다.'“과일 뭐 있어?”'“딸기.”'“줘.”'“예.”'아내가 냉장고에서 딸기를 꺼내어 씻는 것을 보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딸기 접시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딸기 접시를 보고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도 거의 그렇지만 이러다가는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아내의 말을 한마디도 듣지 못 할 날이 올 것 같았다.'아내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방이 세 개인데 안방이 하나 서재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내 서재, 하나는 아내의 서재. '아내 수정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누구와도 깊이 사귀는 것을 싫어해서 가까운 친구도 없고 항상 조용히 책만 읽었다. 결혼식을 끝내고 친구들과 결혼사진을 찍을 때 내 친구들은 계속 나오는데 아내의 친구들은 하나도 없어 처남과 처제의 친구들이 아내의 옆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그때 생각했다. 피곤한 결혼 생활이 되겠구나. '불행하게도 그때 했던 생각이 지금 딱 들어맞고 있다.'오죽하면 동생이 형수의 별명을 절에서 수행하는 비구니 스님 혹은 보살님이라고 지었을까?'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한마디도 하지 않는 아내.'내가 아내의 말문을 트게 하려고 재미있는 말을 쏟아내면 무표정하게 있다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조용하게 살아요.”'그러면 나는 대화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조용한 아내를 좋아해서 결혼을 했지만 요즘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아내의 서재를 잠시 바라보다가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켜서 뉴스를 시청했다. 결혼하고 2년이 못 되는 시간이 흘렀지만 마음으로는 20년 이상이 흐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뉴스가 끝나자 텔레비전을 끄고 빈 접시를 주방에 가져가서 씻었다. 그리고 내 서재에서 회사에서 가져온 서류를 검토했다.'급한 서류는 아니었으므로 대충 내용만 파악하고 정리한 후 아내가 곱게 접어놓은 신문을 읽었다.'10시가 넘어 안방으로 들어가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불을 끄고 스탠드만 켜 놓고 침대에 누워 아내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오늘은 한 달에 한번 있는 부부 관계를 하는 날이다.'알면서 의도적으로 피하는지, 아니면 잊어버렸는지 다른 날과 다름없이 책을 읽느라 오랫동안 서재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11시가 되자 나는 더 기다릴 수 없어 아내의 서재 문을 노크했다.'“아직까지 책 읽어? 목 아프지 않아?”'“예.”'“목 아프다는 거야? 안 아프다는 거야?”'“안 아파요.”'“안 자고 뭐해? 그만 읽고 어서 와.”'“예.”'할 수 없다는 듯 책을 덮는 아내의 행동이 느리다.'잠시 후 방에 들어온 아내는 침대에 누워 등을 돌리고 잠이 들었다.'자자는 뜻은 정말 잠만 자는 것이 아닌데.'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든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쉰 후 눈을 감았다.…'참 조용한 밤이다. 제길.''자명종 시계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오늘도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일어나지 못 했다.'나는 세수를 한 후 아내가 골라 놓은 넥타이와 양복을 입고 주방으로 나갔다.'“좋은 아침이지? 잘 잤어?”'“예. 잘 잤어요.”'“커피 냄새가 좋네?”'“예.”'아내는 계란 프라이와 커피를 내 앞에 놓고 어제 읽다가 중단한 책을 다시 폈다.'“무슨 책인데 그렇게 열심히 읽어?”'내 질문에 아내는 책을 들어 제목을 보여주었다.'“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렇게 많이 읽고 또 읽어? 지겹지도 않아?”'아내는 나의 질문에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수정아.”'“…….”'“장수정 씨!”'아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성까지 붙여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화가 나기 시작한다는 뜻이라는 것 정도는 아내도 알고 있다. '“정말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싶어서 그렇게 열심히 읽고 있어? 스칼렛 오하라 귀신이라도 붙었어?”'간신히 화를 삭이고 농담을 했다. 아침부터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참지 못하면 언젠가는 터지고 말겠지.'내가 생각해도 꽤 오래 참고 있다.'수정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은 후 다시 책에 집중했다.'아침부터 독서삼매경에 빠진 아내 수정을 보며 이번에도 화를 삼켰다. 수없이 많이 물음표가 붙은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것은 단답형의 대답이나 침묵뿐이다.'내가 참고 말지. 말하기 싫다는데 억지로 시켜서 뭐 하겠어?'그렇게 스스로 내 마음을 다독였다.'커피만 마시고 의자에서 일어났다.'“나 출근해.”'아내는 현관으로 가는 나의 뒤를 조용히 따라와서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여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일찍 올게.”'“예.”'다녀오든지, 말든지. 늦게 오면 좋고, 안 오면 더 좋고. 꼭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장모인 한재희 교수에게 전화했다.'“장모님. 접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최 서방인가? 아침은 먹었나?”'“예. 먹고 출근하는 길입니다. 장인어른, 장모님은 아침 드셨습니까?”'“우리도 먹었지.”'“보내주신 추어탕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언제 그 번거로운 것을 다 하셨습니까? 집사람이 많이 도와주었습니까?”'“쉬엄쉬엄 했지.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수정이가 집에 와서 가져갔다고 하던가?”'“아닙니까? 집사람에게 방배동 갔다 왔냐고 하니까 아무 말이 없어서 전 그런 줄 알았습니다.”'“그 애가 또 입을 닫았구먼. 어제 오후에 내가 집에 갔다 왔었지. 수정이가 집에 하도 안 오니 답답해서.”'“예. 그러셨습니까?”'“그럼 혹시 토요일에 수한이 귀국하는데 알고 있나?'아내는 또 나를 바보로 만들고 있다.'“처남이 이번 주말에 귀국합니까?”'“그 이야기도 하지 않았나 보네? 미안하네. 최 서방. 그 애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내가 따끔하게 혼을 낼 테니 자네가 이해하게.”'은사이며 장모인 한 교수의 사과도 이젠 미안해서 못 들을 지경이다.'“아닙니다. 장모님. 집사람이 잊어버렸겠죠. 아마 오늘 저녁에는 이야기할 겁니다. 그럼 바빠서 이만 끊겠습니다.”'“그래. 수한이 오면 우리 집에서 보세.”'“예. 장모님.”'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