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잘 지키세요?>''“야, 그거 내 거야!”'“아니야. 우혁아, 네 건 선생님이 들고 있어. 여기.”'“아.”'금방이라도 신경질을 내려던 우혁은 선생님의 말을 듣자 불러 세운 여자애에게 시선을 한 번 주고는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하나도 가서 앉아 먹어.”'선생님은 멈췄던 하나에게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고 그제야 아이는 자신의 자리로 갔다.'“너 이름이 뭐야?”'“유하나.”'간식을 빠르게 비운 우혁은 오물오물 쿠키를 씹는 하나를 유심히 보다가 물었다. 아이의 가슴께에는 분명 명찰이 채워져 있었다. '“몇 살인데? 나보다 어리지? 오빠라고 불러.”'“여섯 살.”'“여섯 살? 거짓말 마. 근데 왜케 작아?”'하나의 또래에 비해 확실히 작았다. 키도, 얼굴도, 손도, 발도. 자신보다 큰 여자아이들만 봐왔던 우혁은 더 열심히 하나를 보기 시작했다. '하나는 오늘 처음으로 이곳에 왔다. 이때껏 엄마를 친구삼아 놀던 아이는 엄마의 취직으로 인해 새로운 세상으로 나왔다. 내성적인 아이는 아니었지만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첫째 날은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 '놀이터에 나오자 아이는 그제야 웃음이 났다. 모래놀이는 엄마하고도 많이 하던 것이었다. 조그만 손으로 조물조물 모래를 만지며 뭐가 즐거운지 까르르 웃었다. 손등에 모래를 잔뜩 올리고 툭툭 치기도 했다. 혼자만의 세상에서 안심이 됐을 때였다.'“야.”'하나가 고개를 들자 그림자의 주인공인 우혁은 장난감 삽을 내밀었다.'“이걸로 하면 더 재밌는데.”'큰 눈을 깜박거리기만 하던 하나에게 손을 내민 건 우혁이었다. '“같이 놀자.”'“……그래.”'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인 하나에게 우혁이 웃어 보였다. 빛을 가리고 선 탓인지 아이에게 그 웃음은 눈부셨다. 우혁이 냉큼 쪼그려 앉았다.'“그럼 우리 친구다.”'우혁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하나가 얼른 모래가 묻은 손을 털었다. 우혁은 하나가 손을 털기도 전에 새끼손가락을 찾아 걸었다.'“우리 약속했다.”'하나와 우혁은 그렇게 처음 시작했다.'''1'<시간은 잘도 간다>''“유하나!”'“엄마!”'아침부터 모녀는 누가누가 목소리가 큰 가 대회라도 하는 것 같다. '오늘부터 하나는 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이나 걸리는 고등학교로 등교를 해야 했다. 그 모든 사건을 만든 건 엄마였다. 쭉 이 동네에서 살았던 엄마는 자신이 가고 싶었던 고등학교에 무턱대고 그녀의 원서를 집어넣었다. 하나도 모르게.'“이게 말이 되냐고!”'“이러다 늦어. 얼른 입학식 가자.”'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즐거움은 그녀의 엄마에게만 있는 모양이었다. 중학교 등교 시간보다 이른 고등학교에, 한 시간을 버스에 시달려야 한다는 사실이 하나는 아직도 현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네가 소리를 질러도 현실이 바뀌진 않는단다. 이 교복 봐라, 얼마나 예쁘니?”'그녀의 엄마가 그 고등학교를 고른 건 단지 교복이 예뻐서였다. '“정말 미치겠다.”'하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감고 머리를 감았다. 입은 종알종알 엄마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으면서.'“곧 이사 갈 거야, 가자. 아빠한테 애교 부려. 너라면 들어줄 걸?”'“내가 왜 엄마를 위해서 아빠한테 애교를 부려야 돼?”'“우리 딸 완전 예쁘다! 하우고등학교 1학년 유하나.”''“수석 강우혁!”'하나의 눈썹이 움찔했다. 강우혁. 낯익은 이름이었다. 누구지? 생각하던 하나는 이내 엄마가 있는 곳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그녀의 엄마는 싱싱한 꽃다발을 들고 신나 있었다. 버스에서 내내 졸고 있던 하나였지만 왠지 그 모습에 짜증났던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묘한 엄마를 둔 자신을 탓하고 말지.'“강우혁.”'“김은수.”'“박제아.”'3반으로 배정을 받아 출석을 부르는 자리에서 또다시 낯익은 이름을 들은 하나는 대답 소리가 나는 쪽을 향했다. 전혀 모르는 남자였다. 같은 중학교를 나오지도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아이도 아니었다. 하다못해 다니던 학원의 아이들을 모두 늘어놓고 생각해 봐도 비슷한 이름조차 없었다.'“유하나.”'“네.”'그녀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앞자리에 앉아 있던 우혁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선생님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우혁은 같은 교복을 입은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어릴 적 하나가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맞다면 더 예뻐진 게 확실했다. 더 여성스러워진 것도 확실했다.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꼭꼭 약속해, 입을 맞춰 부르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아이는 자신에게 수줍게 웃어 줬었다. 우혁은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그 웃음이 떠올랐다. '“유하나?”'“응?”'우혁은 당당히 하나에게 다가갔다. 수줍은 미소를 상상한 지 3초도 되지 않아 돌아온 건 의문의 눈빛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반갑게 자신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하나는 낯익은 이름의 그가 다가오자 긴장했다. 그때 휴대폰의 문자 수신음이 흘렀고 액정과 우혁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하나는 기억에서 그를 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나 몰라?”'혹시나 했던 말이 우혁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나도 그게 궁금한데, 우리 아는 사이야?”'생각이 나지 않는 하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그녀의 말에 우혁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무슨 사인데? 초등학교 동창? 중학교 동창? 강우혁. 이름은 낯익긴 한데…….”'하나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우혁은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배신감에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가 없었고 선생님이 들어오기도 했다.'자신을 기억 못 한다는 건 충격이었다.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인 건 맞다. 그렇지만 우혁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귀여운 철부지 장난 같았어도 또한 진지했다. 어쨌든 그는 짜증이 밀려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에이씨.”'우혁이 들고 있던 펜을 집어던졌다.'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하나는 머릿속이 간질거렸다. 우혁과 무언가 있긴 한 것 같았지만 맑게 보이지 않았다. '“모르겠다.”'입학식이 끝나고 각종 안내문을 받아든 하나는 서둘러 교문을 향했다. 부득이 기다리겠다는 엄마가 걱정됐다. 봄이라지만 아직 쌀쌀한 날씨였다. '“야!”'앞에서 손을 흔드는 엄마를 발견했을 때 뒤에서 우혁의 목소리가 들렸다.'“정말 나 생각 안 나?”'우혁은 꼭 확인해야 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차라리 자신이 기억하는 유하나가 같은 반 유하나가 아니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머? 우혁이 아니니?”'혹시나 한 기대는 하나의 엄마로 인해 무너졌다. 그녀의 엄마는 우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는 엄마의 반가운 얼굴에 놀랐다. 듣지도 않고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했다. '“잘 지냈어? 어머니는 안녕하시고?”'“엄마가 얠 어떻게 알아?”'“너 기억 안 나?”'“뭘?”'그녀의 엄마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잖아.'하나가 기억하지 못 하는 걸 줄줄이 말하는 엄마를 보던 우혁의 표정이 서글퍼졌다. 이 유하나가 맞았다. 그 조그맣고 귀여운 추억을 기억하는 건 자신뿐이었다. '“내가?”'“그래. 잘 컸네. 아까 수석 발표할 때 설마 했는데 우혁이 맞구나.”'“안녕하셨어요?”'“초등학교 들어가고 못 봤는데 키 큰 거 빼곤 그대로네.”'“엄마, 가자. 추워.”'“우혁인 몇 반이야? 하나, 넌?”'“같은 반이야. 가자, 춥다고.”'모르는 말을 떠드는 엄마를 붙잡고 하나는 응석을 부렸다. '“왜 이래? 알았어. 우혁이 다음에 또 보자.”'모녀의 뒷모습을 보던 우혁은 입술을 내밀어 불만을 표시했다. 자신을 기억 못 한다. 그 약속을 지키고야 말겠다던 다짐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때를 기억할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리던 건 우혁 뿐이었다.'“오, 마이 갓!”'우혁의 주먹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바람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