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고등학교.'신성재단이 운영하는 이 학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정규교육과정을 밟아야 하는 학생신분의 자제를 둔 학부모라면 간절히 바라는 꿈의 낙원, 파라다이스 그 자체였다. 매년 명문대학 합격생이 여타 학교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점만 넌지시 일러주어도 학부모들은 신성고의 맹목적인 신도들이 되길 주저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 있는 한편으로 급식의 질이 어지간한 호텔 뺨친다는 사실에 열악한 교육 환경과 급식인지 짬밥인지 구분되지 않는 식사를 강요당해 온 학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두발규정, 교복착용 등의 교칙을 칼같이 준수한다는 점이 큰 난관이었으나 엘리트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한옥의 형태를 갖춘 고풍스러운 건축물로 인근 주민들한테도 인기 만점이었다.''5월의 어느 날. 교정 곳곳에 봄꽃이 아름답게 피어난 신성고의 분위기가 여느 때보다 더 밝게 술렁이고 있었다.'“누구에요?”'“교생이래요.”'“과목이 뭐래요? 설마 국어?”'“아까 교감 선생님 말씀 들어보니까 무용이라고 하시던데요.”'“다행이다. 저런 미인 교생 데리고 다니면 영 분위기가 어수선해서.”'“그거뿐이야? 자기랑 비교되니까 그러는 건 아니고?”'“어머, 선생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절 그런 옹졸한 사람으로 보시는 거예요?”'“아이고, 왜 화를 내고 그래? 아니면 말지.”'교무실 중앙에 위치한 테이블 끝에 단정히 앉은 이에게 여자선생님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남자 선생님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여름 소나기처럼 줄기차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연한 분홍색 시폰 블라우스에 아이보리색 치마정장을 입은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바르게 앉기의 교본에 실려도 될 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교직원이나 학생들의 자부심이 남다른 신성고는 교육실습생 역시 모교 출신밖에 받지 않았던 까닭에 이렇게 한 명의 교생 선생님만 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수업 끝 종소리가 사라질 무렵, 교과서와 수업 교재가 든 가방을 든 선생님 중에 가장 나이가 위로 보이는 여 선생님 하나가 테이블로 다가왔다.'“임해라 선생님?”'정교사건 계약교사건 혹은 교육실습생이건 학교에서의 호칭은 무조건 “선생님”이었다.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있던 해라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재빨리 일어났다.'“일찍 오셨네요. 문자 받았죠? 교생 담당자 현 미숙입니다. 사회과목을 맡고 있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공손하게 인사한 해라에게 앉으라고 말한 현 선생은 가방을 뒤적이며 몇 개의 문서를 전해주며 바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이건 교육실습생 일정표구요, 그건 지켜야할 사항이 담긴 책자에요. 여기 이건 교과 담당 선생님 연락처랑 교내 안내도. 강당이 하나 더 생기고 여러 가지 보수공사도 하고 있어서 아마 선생님이 학교에 다닐 때랑은 교실 위치가 좀 다를 지도 몰라요. 참고하시구요. 학급은 무용 선생님이 맡고 계시는 1학년 8반으로 정했습니다. 무용 선생님이 지금 수업 들어가셨으니까 이번 수업 끝나면 찾아뵙고 인사드리세요. 그리고 오늘 교감선생님이 출장을 가셔서 자리에 안 계세요. 되도록 빨리 오신다고 했는데 아직 도착을 안 하셨으니까 먼저 교장선생님한테 인사드리도록 합시다.”'창이 없는 벽면에 학교 교표가 금박으로 새겨진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나무 창틀 사이로 들어온 빛이 기다란 책상의 자개장식을 빛나게 해주고 있는 교장실의 풍경은 어느 나라 황후를 알현하러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교장선생님.”'현 선생의 부름에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교장이 고개를 들었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해라의 학창시절 교감선생님으로 있었는데 180센티미터를 거뜬히 넘는 큰 키와 기품 있는 태도, 성우 저리가라 할 정도의 멋진 목소리로 여학생들에게 “선비 선생님”이라 불리며 젊은 남자 선생님들을 제치고 인기 1순위를 차지하기도 했었다. 사립학교인 신성고는 10년에 한 번 꼴로 교직원 평가 및 새 교원을 임용했는데, 그 주기가 바로 3년 전이었다. 따라서 해라의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선생님은 현재의 교장선생님 뿐이었다. 해라는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선생님!”'“그래, 해라야. 아니, 이제 임 선생님이라고 불러야하지.”'열성팬인 몇몇 학생들이 녹음기까지 준비해서 소장하고자 했던 멋진 목소리는 여전했다. 가장 상석에 교장 선생님, 그리고 현 선생과 해라가 마주보는 형태로 탁자에 앉았다. 교장실 밖에서 행정업무를 보던 직원 하나가 쟁반에 찻주전자와 찻잔 세 개를 가져와 세 사람 앞에 쪼르르 차를 따라주고 나갔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향긋한 꽃내음에 따스하고 달콤한 차향이 섞여 들었다. 마냥 어리기만 하던 제자가 하나 둘 멋지게 성장해서 찾아오는 모습에 이루 말 할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는 것으로 말문을 연 교장선생님은 교사로서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에 대해 알려주었다. 현 선생과 해라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거나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경청의 자세를 유지했다. 그 다음엔 대학 생활은 어떤지, 부모님은 잘 계신지 등의 몇 가지 소소한 질문을 했고, 해라와 함께 그녀가 기억하는 학교의 모습 등 가벼운 주제로 환담을 나누었다. 연신 기분 좋게 허허 웃은 교장 선생님이 현 선생에게 물었다.'“오늘이 첫 날인데 일정이 어떻게 되지요?”'“우선 담임선생님을 찾아뵙고, 학급 아이들과의 대면은 담임선생님과 상의해서 결정하기로 했습니다.”'“음, 그래요. 담당선생님은 누구시죠?”'“1, 2학년 무용 담당하시는 차진주 선생님이십니다.”'“아, 차 선생이로군. 그럼 이제 임 선생은 가서 차 선생님 만나 뵙고 인사드리도록 해요.”'“예.”'해라가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나가자 교장 선생님이 “이런.”하고 낮게 중얼거렸다.'“왜 그러세요, 선생님?”'“꼭 해둘 말이 있었는데, 못했네요.”'“무슨 말씀이신데요?”'“학생들 말이에요, 조심하란 말을 했어야 했는데.”'“어머, 교장 선생님도. 저희 학생들처럼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도 없어요. 옆 학교 선생님들이 저희 학생들보고 천사나 다름없다고 하실 정돈데요. 조심할 게 뭐 있나요.”'교장 선생님은 현 선생의 말에 가타부타 의사표현을 하지 않은 채 옥색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지는 차와 함께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 '‘임 선생이 학생을 조심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임 선생을 조심해야 한단 소리였는데.’''무용 담당의 차진주 선생님은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소녀 같은 사람이었다. 키가 작은 편인 그녀는 날씬하게 균형 잡힌 해라의 체형이 부럽다고 스스럼없이 말하기도 하고, 너무 미인이시라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을 제대로 못 할 것 같다며 솔직한 느낌도 털어놓았다. 담임 학급의 시간표와 자신의 교과목 시간표를 해라에게 전해준 차 선생은 지금 잠깐 담당 학급에 들어가서 인사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원래 첫 인사나 그런 게 너무 거창하면 좀 부담스럽잖아요. 아니면 역시 내일 정식으로 하는 게 좋으려나?”'“아뇨, 지금 가서 짧게 인사할게요.”'“그래요, 그럼. 참, 학생들한테 반말로 말씀하시면 안 돼요. 개별적으로는 괜찮지만, 수업 중이나 다수의 학생에게는 꼭 존대를 해주셔야 해요.”'“네, 그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