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손대지 마!"'수현이 재인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몸이 잘려 나간 짐승이 토해내는 듯 아프고 처절한 비명이 무거운 공기를 흔들었다. 재인은 두려웠다. 이 남자가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하던 걸 봐버린 지금,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이 무너져 영영 돌이킬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또다시 그를 잃을 순 없어. 다시 돌아오게 해. 이제 겨우 마음 놓고 웃기 시작한 그로 돌려놔야 해.󰡑'재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수현에게 달려들었다.'"수현 씨!"'"비켜!"'그가 거세게 밀치는 통에 재인의 작은 몸이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재인은 지지 않고 수현을 끌어안았다.'"악몽이에요. 악몽 꾼 거예요. 이젠 누구도 괴롭히지 않아요."'"닥쳐! 그 입 다물어! 내 앞에서 당장 꺼져!"'"날 봐요, 수현 씨."'재인은 식은땀에 흠뻑 젖은 수현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깊은 우물 같은 눈과 재인의 간절한 눈빛이 휘감겼다. 둘은 잠시 말을 잃었다. 상처, 절망,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수현의 눈동자와 재인의 괴로운 눈동자가 부딪히며 아픈 마음을 건드렸다. 재인은 검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의 감정에 맞서 침착하게 속삭였다.'"수현 씨, 괜찮아요. 악몽은 누구나 꿔요."'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땀에 젖어 축 늘어진 몸과 무너진 자존심을 추스르려 애쓰는 모습이 망막에 아프게 파고들었다. 차라리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그가 이토록 괴로워하지 않을 텐데. 재인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특히 그의 눈이, 상처받고 성난 눈이 마음을 찔렀다.'그의 눈이 재인에게 묻고 있었다.'󰡐모든 걸 봐버린 느낌이 어때? 나란 놈에 대해 다 알고 나니 끔찍해? 그래서 혐오해?󰡑'재인은 괴로웠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 당장은 섣부른 동정도, 위로도, 구체적인 물음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보이는 반응에 그의 상처가 더욱 깊어질 수 있으니까. 재인은 조심스럽게 수현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수현 씨, 온몸이 땀에 젖었어요. 이러다가 감기 걸려요. 우리 씻어요."'재인이 수현을 부축해 일으키자 그는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욕실로 향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재인을 물끄러미 보았다. 서늘하고 차가운 수현의 눈빛에 재인은 심장이 차게 식는 것만 같았다.'󰡐지금 무슨 생각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 마음이 보였는데 이젠 보이지 않아요.󰡑'재인은 암담하고 서글펐다. 그가 아주아주 멀리 가버린 것 같다. 그때 재인을 보던 수현이 자신의 손으로 잠옷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재인은 그가 옷 벗는 모습을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목에서 신음이 넘어와 필사적으로 삼켜야만 했다. 무수한 상처. 세월에 희미해진 것도 있고 깊어서 흉하게 남은 것들도 있었다. 그 상처 하나하나가 무섭다고 울고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재인은 문득 초등학교 시절 하얀 도화지 위에 크레용으로 색을 칠하고 플라스틱 조각이나 샤프펜슬로 긁어내던 스크래치 그림을 떠올렸다. 검은색으로 덧칠해져 본래의 색을 알 수 없는 도화지. 그 위에 상처를 내서 그림을 만들 듯 수현의 몸엔 무수한 상처가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남편의 풍경은 외롭고 쓸쓸했다. 삭막함 속에 누런 먼지가 풀풀 날리는 폐허, 눈물, 고독이 떠올랐다. 이렇게 되는 동안 그의 영혼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을지 재인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아무도 지켜주지 못한 몸에 남은 상처는 무참했다. 쇄골, 어깨, 가슴, 복부를 지나 골반까지 어지러이 얽힌 흉터. 반면 그의 팔엔 다른 흉터와 달리 예리한 무언가로 베인 듯 짧고 깊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한눈에도 칼자국이라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절망적이었을까? 상처받다 못해 스스로 상처 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재인은 늘 손목시계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상처도 보았다. 졸업식 때 난 상처. 재인은 수현의 과거를 보는 것이 너무나도 괴로워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안 돼. 봐야만 해. 이 사람은 내 남편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알아야 해.󰡑'하지만 두렵다. 그의 몸에 난 상처가 재인을 휘감아 꽁꽁 묶어둘 것만 같았다. 순간 겁이 왈칵 나며 목덜미가 쭈뼛하고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숨 쉬는 것이 버거웠다.'󰡐난 감당할 수 없어. 무서워. 도망가고 싶어.󰡑'재인은 자신에게 놀라고 실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겁한 사람이었던가. 그의 몸에 난 상처가 무서워 덜덜 떨 정도로 이 사랑이 가벼웠던가.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괜찮다고 안아주어야 할 텐데 왜 이렇게 겁이 나는 걸까. 재인은 자신에게 화가 나서 울고 싶었다. 재인의 눈빛이 고통으로 이지러지고 있을 때 그와 눈이 부딪혔다. 수현은 완전한 알몸으로 재인 앞에 서 있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상처로 얼룩져 있던 눈빛이 이젠 서리가 내린 것처럼 허옇게 버석거렸고 얼굴엔 희미한 냉소마저 드리워 있었다.'"끔찍하지?"'그의 차디찬 목소리에 재인의 심장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아픈 자리를 너무나도 정확히 짚어내 󰡐아야󰡑 하고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이게 내 실체야. 내가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었던 추악한 모습. 가끔 생각했어. 이런 날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놀라서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거기까진 아니군."'그의 씁쓸한 목소리를 들으며 재인은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모습을 보는 수현의 입매가 일그러졌다.'"왜 보고만 있는 거야?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끔찍하다든지, 역겹다든지."'재인은 아무 말도 못하는 자신이 바보 같아서 화가 났다.'󰡐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아무리 자신을 채근해도 생각은 흐르지 않고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수현이 시선을 옆으로 흘리며 중얼거렸다.'"나는 내가 끔찍해. 괴물 같아."'괴물이라는 말에 심장이 한 뼘 더 밑으로 떨어졌다. 재인은 비로소 멍한 표정을 지우고 메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당신은 괴물이 아니에요. 누구나 상처는 있어요."'"국어 선생이라 그런지 위로도 교과서적이군."'수현이 싸늘하게 웃었다. 차가운 그는 싫다. 자기혐오로 가득 찬 눈빛도, 너는 절대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란 표정도 싫다. 재인은 그의 자상함과 온기가 간절했다.'"내가 말했잖아. 나란 놈 불구야. 어디 하나 온전한 곳이 없어. 몸도 정신도 엉망이야. 이런 내가 왜 끔찍하지 않지? 내가 보아도 끔찍하고 역겨운데 왜 거짓말해!"'"수현 씨."'재인이 괴로운 얼굴로 다가서려 하자 그가 거칠게 윽박질렀다.'"동정하지 마. 그런 눈빛 보였다간 어디 하나 부러질 줄 알아."'"수현 씨."'"보기엔 그럴듯한 사과였는데 안을 보니 온통 벌레 먹어서 김샜겠군. 뭐 하나 온전한 게 있나. 미쳐서 정신병원에 들락날락했다지, 몸은 걸레처럼 해어져 만신창이지. 어린애처럼 자다가 벌벌 떨기나 하고. 정말…… 나라도……."'"그렇게 말하지 마요.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요."'그가 화난 눈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재인은 쏘는 듯한 눈빛을 받는 것이 힘겨웠지만 버텨냈다.'"왜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아요? 왜 끊임없이 괴롭히고 상처 줘요? 아픈 사람은 당신이잖아."'재인이 그에게 성큼 다가섰다. 수현이 움찔하며 물러났지만 그녀의 손이 먼저 어깨에 닿았다.'"꿈속에서 당신은 아파하고 괴로워했어요.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오히려 자신을 괴물 취급하고 내가 어떻게 볼지 걱정하며 화내요. 이건 아니잖아요. 지금 걱정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에요."'재인은 손바닥 아래 그의 온기와 피부 질감을 느꼈다. 그의 피부 아래 돌고 있는 뜨거운 피와 숨을 느끼며 수현 또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길 바랐다.'"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요? 당신이 무서워요. 당신이 괴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을지, 나도 상처만 주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그래요."'정신없이 말을 쏟아내고 있자니 뿌연 안개 같던 머릿속이 점차 분명해졌다. 재인은 조금 더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수현 씨,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나는 당신이 가진 많은 문 중에 하나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얻은 거예요. 당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든, 어떤 모습이든 나는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미리부터 겁먹지 말고, 화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받아들이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