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왔어."'학교에서 퇴근해 돌아온 재인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 엄마 타령이냐며 어른들이 잔소리해도 재인은 좀처럼 버릇을 고치질 못하고 엄마부터 찾곤 했다.'"어머, 자기 얘기하니까 냉큼 달려오네. 호호호."'익숙한 목소리 대신 꾸민 듯 요란한 웃음소리가 먼저 들렸다. 이 목소린 한씨 집안 트러블메이커인 큰고모의 목소리? 재인은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화려한 차림새를 한 큰고모가 엄마와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저 양반이 오늘은 무슨 염장을 지르려고 왔나.󰡑'재인은 언짢은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고모 오셨네요. 그동안 안녕하셨어요?"'"우리 재인이 왔구나. 잘 있었어? 못 본 새에 얼굴이 더 활짝 피었네."'뭔가 아쉬운 부탁을 하려는 듯 다른 때보다 말투가 상냥하다. 재인이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그 옆에 앉은 엄마를 보는데 희숙의 수다가 이어졌다.'"요즘 많이 바쁘니? 얼굴 보기가 어렵다."'"오월에 학교행사가 많아서 바빴어요."'"중학교 선생이 바쁘면 얼마나 바쁘겠어. 이왕 선생질할 거면 대학 교단 같은 데 서면 좋잖아. 폼도 나고, 어디 가서 말하기도 좋고. 겨우 중학교 선생이 뭐니?"'그러면 그렇지. 재인은 속으로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원래 말 한마디를 해도 정이 딱딱 떨어지게 하기로 유명한 양반이다. 재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앉았다. 엄마를 살피니 웬일로 조금 들뜬 얼굴이다. 올 때마다 명품 옷에 보석을 주렁주렁 걸치고 와서 자식 자랑을 늘어지게 하고 가는 터라 꼴도 보기 싫다더니 오늘은 웬일로 얼굴색이 다르다. 무슨 일이지? 재인은 슬쩍 궁금해졌다.'"어쨌든 선생이니까 얌전해 보이고 여자 직업으로는 딱 좋지. 지금까지는 다 고만고만해서 내 마음에 안 찼는데 마침 환상적인 신랑감이 나왔지 뭐니. 내가 중매쟁이 십 년에 이런 혼처는 처음이야. 이거 잘되면 옷 한 벌이 아니라 차라도 한 대 뽑아줘야 될걸?"'재인은 희숙의 표현이 재미있어서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어디 좋은 부동산 매물이라도 나온 것처럼 말하시네. 환상적인 신랑감이라.󰡑'재인은 깐깐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는 고모 기준에서 환상적인 신랑감은 누구를 이르는 건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특유의 버릇대로 콧대를 도도하게 세운 희숙이 약간 으스대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이번에 들어온 선 자리 아버지 되는 양반이 유일상선 회장이야. 유일그룹 알지? 그 계열사잖아. 집안 대대로 재벌이라구, 재벌. 내가 딸만 있었어도 내 딸 짝지어주는 건데. 준형이 아빠가 딸 하나 낳자고 할 때 하나 낳았으면 완전 팔자 폈을 거 아냐. 괜히 몸매 버린다고 안 낳아서 이렇게 후회를 하네. 아무튼 이름만 들어도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집 아들이니 말해 뭘 해. 게다가 외아들에 시어머니는 예전에 죽고 시아버지 혼자래. 깐깐한 시어머니 없겠다, 나중에 큰 재산 고스란히 내 거겠다 이렇게 좋은 자리가 없지. 신랑 인물도 그렇게 좋다네. 뭐, 사진 찍는 거 싫어해서 최근 사진이 없다는데 사내답게 시원시원하게 생긴 것이 그만한 인물이 없대. 어때? 좋지? 네 엄마는 분에 넘친다고 부담스러워하는데, 고민할 것도 없는 자리야. 이 자리 안 나가면 어딘가 덜떨어진 거지. 세상에 이런 자리가 어디 있다구."'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늘어놓은 희숙은 기대에 찬 눈으로 재인을 보았다. 잔뜩 흥분에 들떠서 펄쩍펄쩍 뛸 거라 생각한 그녀의 기대완 달리 재인은 무덤덤했다.'󰡐저 쥐방울만 한 게 자기가 얼마나 큰 떡을 앞에 뒀는지 알고선 저러는 거야? 지 엄마 닮아서 맹해가지고선, 세상 물정 모르는 숙맥.󰡑'희숙은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재인의 얼굴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큰 눈을 끔뻑끔뻑하며 가만히 앉은 재인은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어이없이 웃었다.'"후훗, 유일상선 아들이요? 재벌? 에이, 그렇게 으리번쩍한 집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 집이랑 혼사를 맺으려 하겠어요. 게다가 고모 말씀처럼 저는 고작 중학교 선생인데요. 그런 집은 대개 수준에 맞는 곳이랑 하지 않아요? 정략결혼 같은 거요."'"그 집 아버지가 그런 거 싫어하는 깨인 분이라 그래. 되도록 본인이 연애해서 결혼하기를 바라는데 일만 하느라 연애할 생각을 통 안 해서 참한 규수를 찾더라고."'"나이가 몇인데요?"'"스물여덟."'"와, 젊네요. 왜 벌써 결혼을 해요?"'"빨리 결혼해서 안정을 찾아야 일도 잘할 거 아냐. 어때? 선볼 거지?"'"안 볼래요."'재인이 가볍게 거절하자 희숙의 얼굴이 붉어졌다. 성격대로 하자면 큰 소리로 화내고 야멸차게 꼬집어줄 텐데 어미 앞이라 애써 참았다. 열받은 희숙을 보니 재인은 괜스레 고소해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제정신이니? 이런 황송한 자릴 왜 거절해? 평생 한번 만나볼까 말까 한 사람이야. 잘만 되면 재벌집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살 걸 왜 마다해?"'"사람 그릇은 타고나는 거라면서요. 제가 무슨 재벌 사모님이에요."'"나 참, 너라고 재벌 사모님 소리 못 들을 이유가 없잖아. 이번 혼사만 잘돼봐라. 요즘 네 아버지 사업 자금 안 돌아 쩔쩔매는 거 사위가 알아서 밀어줄 테고, 으리으리한 집에, 기사 딸린 차에, 가정부 두고 평생 물리게 쇼핑 다니며 편히 살 텐데 왜 들어온 복을 걷어차?"'부아가 치밀어 꼭지가 반쯤 돈 희숙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재인은 평상시에 잘 챙기지도 않던 조카 앞날을 걱정하는 고모가 영 달갑지 않았다. 속내가 너무나도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아니, 중매비가 얼마기에 이렇게 열을 내신데? 그렇게 좋으면 고모가 보시던가요.󰡑'재인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사람 염장을 살살 긁었다.'"아이참, 고모는 고모가 시집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그 자리가 그리 좋으면 고모 친구 딸이라도 데려가세요. 왜 그 인물은 탤런트 뺨치게 예쁘고 대학 수석으로 졸업해 대기업 다닌다는 아가씨 있잖아요. 아니면 이번에 외교관 됐다는 시댁 조카를 소개하던지요."'재인의 말에 희숙의 눈빛이 점점 새치름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한번 삐치면 오래가는 터라 엄마가 눈짓을 했지만 재인은 마냥 신나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선본다고 재깍 결혼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남들 보면 수십 번씩 봐도 제짝 못 찾던데요. 제 나이 이제 스물여섯인데 선 시장에 이름 올려놓고 이리저리 얼굴 팔고 싶지 않아요. 재미없게 선은 무슨."'󰡐사실 제대로 된 연애도 못해봤다고요.󰡑'재인은 뒷말을 꼴깍 삼키며 배시시 웃었다. 재벌 아들이든 대통령 아들이든 연애도 한번 못해보고 선봐서 시집가고 싶지 않다. 그리고 선만 보면 다 결혼하나? 잘난 집 아드님 앞에 데려다 놓은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자신이 눈에나 차겠는가. 고모가 늘어놓는 말은 재인에게 허영에 들뜬 판타지로 들렸다. 재벌과의 결혼이라니,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신데렐라 스토리다. 재인은 그저 성실하고 다정한 남편 만나 큰 풍파 없이 화목하게 사는 게 꿈이었다.'"얘가 왜 이리 철이 없어? 스물여섯이 적은 나인 줄 아니? 지금도 늦었어. 얘가 자기 값어치가 얼마나 하는지도 모르고 큰소리야. 이건 정말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선이야. 네가 나 아니면 어디 가서 이런 남자 구경해 볼 거야? 언니, 이런 기회가 있는 줄 알아요? 다른 집에서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드는 거 고생하는 우리 오빠 생각해서 왔더니."'희숙은 싹수없는 딸년은 제쳐 두고 어미를 공략했다. 하지만 모전여전이라고 들려온 대답은 재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애가 싫다잖아요. 좋은 자리긴 하지만 사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차이지는 거 같고. 한쪽이 너무 기울면 안 좋은 법이에요."'"요즘 오빠 사업이 좀 줄어서 그렇지 예전에는 꽤나 잘나갔잖아요. 갖다 붙이지 못할 건 아니니까 내가 온 거지, 그러지 말고 한번 봐요."'"그래도 억지로 내보낼 순 없는 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