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드는 파도처럼 화이트와 블루 조명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바(Bar) 안. 커다란 수족관을 연상시키는 그곳에 조금은 이질적인 분위기의 두 남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왼쪽의 남자는 예리하게 각 잡힌 블랙 슈트를, 오른쪽의 남자는 편한 느낌의 캐주얼 차림을 하고 있었다. 파란 조명 빛이 어린 여인들의 시선이 두 남자를 향해 고루 분산되었다.'“그래서?”'긴 이야기 끝에 왼쪽에 앉은 준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고작 ‘그래서?’뿐.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계획을 피력하는 규란의 말엔 전혀 관심 없다는 얼굴로 얼음 반, 양주 반인 글라스만 빙빙 돌렸다. '하지만 규란은 너의 무시 따위 이젠 사랑스럽기까지 한단다, 웃으며 준의를 향해 오른쪽 눈으로 깜찍한 윙크까지 날려댔다.'“그래서는! 솔직히 32평 아파트, 남자 혼자 살기는 너무 적적하고 쓸쓸하고 외롭잖냐. 그래서 이 형님이 앞으론 너의 공허한 마음을, 아니 집을 좀 채워주겠다 이 말이지.”'“누구 마음대로?”'규란은 언제 능청스런 윙크를 날렸냐 싶게 애처로운 표정으로 준의를 쳐다보았다.'“뭐냐, 그 반응은? 그러니까 지금 너마저 나를 내치겠다 이거냐?”'“줄이자면, 이젠 네 쌍둥이 조카들이 부쩍 자란 데다 셋째 조카까지 다 커서 방을 뺏기고 집에서 쫓겨났으며 내 반대에도 무릅쓰고 얼마 전 무모하게 카페 개업까지 해버린 터라 지금 당장 집 얻을 돈도 없고, 때문에 그렇게 무능하고 무책임한 네놈을, 단지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떠맡아야 한다 그건데.”'“깔끔하네! 역시 똑똑해. 내가 그래서 너랑 친구하잖냐, 사랑스러운 자식.”'“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냉정한 한마디에 규란은 한층 더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네 잘난 형님들한테 집 한 채 해달라 그러지 그러냐. 잘 나가던 전직 톱모델에 대학병원 과장님까지. 형들 뒀다 어디 쓰냐? 눈물 나는 친형제인 척은 다 하더니 이럴 땐 다들 내빼시는 모양이지?”'친형제인 척이라니. 규란의 얼굴이 급격히 싸늘해졌다.'그런다고 겁날쏘냐. 지금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이는 규란인 것을. 준의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규란을 향해 어깨를 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뭐, 인마.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건데?”'“난 말이다.”'“어.”'“무심하게 남의 상처를 건드리는 싸가지 없는 네 그 성격이.”'규란의 음성이 한층 싸늘해졌다. 그래도 준의는 여전히 태연자약, 픽 비웃음만. '“계속하지?”'그 웃음에 결국 속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당장 주먹이라도 한 대 날릴 것처럼 기세 좋게 일어나 준의에게 달려든 규란의 다음 행동은.'“야, 야!”'고작 준의의 목에 헤드락을 거는 것이었다. 장난이라 하기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억센 힘이 걸린 헤드락.'“친구 보기를 돌같이 아는 한결같은 네 그 성격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좋다, 새끼야! 에라이!”'애써 굳은 표정을 하던 규란의 얼굴이 금세 익살스럽게 변하더니, 더 힘껏 팔에 힘을 주어 준의의 목을 졸라댔다.'“쿨럭! 놔? 좋은 말할 때 놔라, 설규란?”'“너 같으면 놓겠냐? 다 인과응보, 자업자득이다, 자식아.”'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진 정말 목을 감은 팔을 풀지 않을 생각인가보다. 점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림을 느낀 준의는 결국 오른팔을 흔들며 항복을 선언했다.'“월 30. 그 이하는 안 돼.”'“엉?”'허술한 규란의 팔에 그새 힘이 빠졌다. 그 틈을 타, 준의는 마치 형사가 범인에게 하듯 제 목에 둘러 있던 규란의 팔목을 등 뒤로 잡아 꺾곤 허리춤에 바짝 갖다 붙였다. 눈 깜짝할 사이 단번에 상황이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아악! 야, 야! 놓고 얘기하자, 놓고. 21세기 지성인들이 이런 폭력적인 대화를 해서야 쓰냐?”'준의에게 잡혀 등 뒤로 꺾인 팔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는 규란과 씨익 웃으며 규란의 팔목을 잡은 손을 더 힘껏 움켜쥐는 준의. 아름다운 풍경임이 틀림없다.'“지성인이 뭔지나 아는 놈이냐, 네가?”'“목, 목! 잘못했다, 친구야. 친구야아!” '“월세 30, 협상 같은 거 애초에 꿈도 꾸지 말 것. 기타 청소, 빨래도 다 네 몫. 친구나 여자 데려오는 것 절대 금지. 12시 이후 소음 금지, 샤워 금지.”'이 무슨 산골 기숙학원 주의사항 같은 소린가. 규란은 말도 안 된단 표정으로 등 뒤로 고개를 돌려 애처롭게 준의를 바라봤다.'“야. 넌 자식아, 무슨, 젊은 놈이 하하! 금지를 그렇게 좋아하냐, 인마! 하하! 긍정적 마인드 몰라? 포지티브 띵킹, 엉? 하하, 하하하!”'하지만 어색한 웃음으로 어떻게든 때워보려는 규란의 수작을 준의가 모를 리 없었다. 등 뒤에 바짝 붙는가 싶더니,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털을 바짝 서게 만드는 소름끼치는 준의의 음성이 규란의 웃음을 단번에 앗아갔다.'“웃지 마. 덜 떨어져 보여.”'더 잡고 있기도 귀찮다는 듯 규란의 손목을 놔준 준의는 의자를 빙글 돌려 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야야 엄살을 떨고 손목을 호호 불며 울상을 짓는 규란을 못 본 척했다. 얼음이 적당히 녹아 아지랑이처럼 알코올에 섞여가는 양주잔을 들어 올렸다.'“현관 왼쪽 작은방 써. 빌붙는 기간은 최장 1년이다. 그 안에 돈 모아 독립해.”'준의 옆 의자에 얌전히 자리하려던 규란이 그 말에 다시 몸을 벌떡 일으켰다.'“그 방 네 집에서 제일 작은방이잖아! 부엌 옆에 있는 방, 그거 주라, 응? 그리고 자식아. 전세 계약은 2년이 최단 기간이다, 몰랐냐? 흐흐.”'그때 준의가 글라스를 탁 소리 날 정도로 바 위에 내려놓았다. 곧 바짝 날이 선 시선이 규란의 얼굴을 주시했다.'“계약? 너 지금 계약이라 그랬냐? 그럼 어디 제대로 된 계약서부터 작성해 볼까? 보증금에 월세 시세대로 다 받고, 전세기간이며 계약 종료 월, 일까지 상세하게 해봐?”'이래서 부익부 빈익빈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거다. 가진 자들이 저리 뻗대니, 어찌 개천에서 난 자들이 쉬이 용이 되길 꿈꾸리오.'“꼬우면 딴 집 알아봐. 아니면 하루빨리 나갈 생각을 하든가.”'못된 자식, 치사한 자식 퍼부을 줄 알았는데 어째 조용하다. 관심 없는 듯 웨이터에게 빌지를 달라고 하면서 눈으로만 흘깃 규란의 동태를 살펴보니, 눈을 얇게 뜬 채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리고 있다. 뭘 그리 심각하게 중얼대나 싶어 자세히 들어본다. 그런데.'“방세를 내리게 하는 주문. 금지 소리를 금지하게 하는 주문. 불쌍한 설규란을 굽어 살피게 하는 주문…….”'강준의,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어릴 때야 그렇다지만 뻑 하면 주문을 외는 저 버릇을 지금까지도 고치지 못한 규란을 이해할 수가 없다. 웨이터가 내미는 빌지를 받아들곤 규란의 머리를 냅다 내리치기 시작했다.'“닥쳐. 닥쳐, 자식아!”'규란은 두 팔을 들어 준의의 공격에 맞서며 보란 듯 소리를 질렀다.'“사악한 저 마귀를 무찌르게 하는 주문! 거지같은 성질 좀 개과천선 시키는 주문!”'“너 그 주문질도 금지야? 내 집에서 정신 사납게 주문 어쩌고 하기만 해! 그날로 아웃이니까!”'먼저 자리를 박차고 문 쪽으로 향하는 준의를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던 규란이 한걸음에 달려가 그의 어깨에 팔을 척 감았다. 그에 호응하기는커녕 준의는 바지 주머니에 쿡 찔러 넣은 두 팔을 뺄 생각도 않은 채 규란을 노려봤다. '“안 치워?”'눈썹을 치켜세우는 것조차 앙탈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흐흐, 웃으며 그를 쳐다본다.'“친구야.”'“뭐, 인마.”'“친구야!”'“아, 왜!”'“사랑한다!”'“이런, 미친!”'준의가 기함을 하며 규란의 팔을 저 멀리 내던졌다. 그에 질세라 규란은 아까보다 더 세게 그의 어깨를 감아왔다.'“고맙다, 친구야! 알콩달콩 잘 한번 살아보자, 우리!”'그들이 어깨동무를 했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가게를 나섰다. 어깨 높이가 비슷한 두 남자의 티격태격 뒷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여자 손님들의 입에서 안타까움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요즘 좀 괜찮다 싶은 남자들은 죄다 게이야.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