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울었을까. 세연은 눈물도 나지 않을뿐더러 이제는 앞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웬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오는 건지 올 때마다 기계적으로 절을 하는 것도 허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3일째. 내일이면 장지로 갈 텐데 오늘밤에는 손님이 너무나 많았다. 아직도 저 사진 속에 웃고 있는 할아버지는 금방이라도 세연아 밥 먹자 하는 말을 하실 것만 같은데 결도 껄끄러운 관안에 낯설게 껄끄러워 보이는 베옷을 입고 누워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니 으스스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낯선 이 사람, 옆에서 무의식적으로 절을 하고 악수를 받고 위로를 받는 이 사람. 세연은 아버지라는 사람이 분명하지만 전혀 아무 기억도 없는 사람이었다. ''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버리고 이 아빠라는 사람이 사라진 뒤에 자신을 키워 준 것은 할아버지 한 분 뿐이었다. 어렸을 적에도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에서 교장선생님으로 직함이 바뀌시기도 했지만 어린 세연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고 키워주신 할아버지. 정년퇴임을 한 뒤에는 세연이 대학교를 가고 졸업했어도 두 사람은 마치 부녀지간처럼 아무런 부족함 없이 살아왔었는데……. 정말 순식간에 멀쩡하던 할아버지를 딴 세상으로 데려간 뇌출혈이라는 병은 정말이지 한 줌의 고통도 없이, 한 순간의 준비도 없이 할아버지를 세연의 곁에서 앗아가 버렸다.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는 수많은 제자들이 다녀가고, 선생님들이 다녀간 뒤라 세연은 정신이 멍한 지경이 되어버렸다. 앉아 있는 것도 마치 물속에 있는 것만 같다고 할까. 먼 친척들이 와서 손님을 치르고 상례를 주관하는 3일 동안 세연에게 밥이든 물이든 권해왔지만 겨우 생수 몇 병 밖에는 목구멍을 넘기지 못했었다. 이제 더 이상 목소리도 나올 것 같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것도 가물거리는데 몇 시나 되었는지 다른 쪽에도 북적거리던 장례식장에도 손님이 드문드문 오는 것으로 보아 12시도 훌쩍 넘긴 시간 인 듯 느껴졌다. 아버지란 사람이 엊그제 나타나서 내내 옆에 있더니만 지금은 그 마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문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와 홑겹 옷 위에 덧입은 하얀색 치마저고리 사이로 파고들어서 장례식장의 바닥은 따뜻했지만 으스스한 감기기운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 그때였다. 온통 검은색과 흰색의 색조뿐인지라 검은색이 낯설지 않은 장례식장에 또각또각 하는 구둣발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너무나 조용해서, 낮에는 옆방에 금방 차려진 빈소에서는 여자의 통곡소리가 요란했었고 밤 내내 목이 가라앉은 여자의 흐느낌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나마 자정이 넘자 그 소리도 잦아들어 조용하기 그지없는 침묵사이로 똑똑한 발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세연은 누군가 오는가 보다하고 철퍽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추슬렀다. 흐릿한 시선너머로 완벽하게 새카만 슈트에 눈이 시리게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까만 넥타이를 맨 어마어마하게 키가 큰 남자가 천천히 들어섰는데 그 뒤로는 몇 명인지 모를 키 큰 남자들이 뭉쳐서 따라오더니 멈춰 섰다. 사람의 수가 언뜻 보아도 열 댓 명은 되어보였지만 이상하게 구두소리는 딱 한사람의 발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뒤에선 사람들에게서는 마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세연은 아무래도 자신이 지금 제 정신이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맨 앞에 들어선 남자는 구두를 벗고 천천히 다가오더니 향을 꽂고 가볍게 목례만 하였다. 장례식도 다 각각이라 절을 하는 사람 향을 올리는 사람 술잔을 돌리는 사람 등 여러 사람들이 있었는데 세연이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걸 봐서 인지 아니면 뭔가 이유가 있는지 그 사람은 술잔이 옆에 있는데도 가만히 서서 영정을 처다 보더니 상주인 세연에게는 인사조차 없이 휙 돌려서 나가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연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조차 새어나오지 못했다. 휙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세연의 눈에 띈 남자의 싸늘한 표정이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커다란 키에 새카만 슈트, 그리고 새카만 머리카락은 뒤로 잘 빗어 넘겨져 있어 한 올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매끈한 이마선 밑에 짙은 눈썹아래 자리 잡은 새까만 눈동자는 전혀 아무런 감정도 싣고 있지 않은 듯 보이는데도 세연에게는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싸늘한 공포를 전해 주는 것 같았다. 언뜻 스치는데도 너무 강렬한 인상을 주는 얄따란 입술 끝에도 전혀 감정이라곤 묻어나지 않았다. 남자가 스치고 지나간 뒤에는 하루 종일 지독한 향냄새에 머리가 아팠던 그녀에게 희미하지만 써늘한 느낌의 뭔가 모를 향수냄새가 싸하게 비껴가는 것이 느껴졌다. '' 누구였는지도 알 수 없는 그 공기조차 시커멓게 물들이는 것 같은 남자와 뒤에선 한 무더기의 남자들은 마치 꿈속이었다는 듯 물이 빠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만 그 무더기에서 나온 듯한 덩치가 좋은 남자하나가 다가와서 역시 그 남자처럼 향을 꽂더니 목례를 하고 두툼한 봉투를 조의금 함에 넣고는 세연을 한번 흘끗 쳐다보고 사라져버렸다. '' 세연은 멍하니 그 남자들을 지켜보았지만,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조차 몽롱해졌다. 눈앞에 스쳐지나간 저 횡포하고 싸늘한 눈빛이 꿈은 아니었을까,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저 싸한 향수조차 혼수상태 끝에 찾아온 착각일까 싶을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세연의 곁을 갑자기 떠났다…….''세연은 텅 빈 아파트에 들어와서는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새 먼 친척들이 와서 할아버지의 옷가지나 소지품등을 불우이웃돕기 단체 등에 기부하는 등 정리 하는 것들을 도와주고 북적북적 할 때 만해도 모두들 다 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곧 조의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남은 재산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옥신각신했지만 할아버지의 유산이라고는 달랑 이아파트와 낡은 구형 소나타 한 대 밖에 없었고 그것은 세연의 앞으로 다 유서가 정리되어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는 증거로 조의금을 나눠가지고 다들 썰물처럼 빠져 나가버리자 세연은 드디어 텅 빈 빈집에 혼자 남을 수 있었다. '' 물 생각이 간절해져 냉장고를 열자 할아버지가 담가놓은 김치가 여전히 김치 통에 든 것이 보였다. 세연은 혼자 김치도 제대로 못 담그는데……. 그제야 며칠 동안 친척들의 어이없는 날선 싸움에 곤두섰던 신경이 와락 허물어져 내렸다. 냉장고를 닫지도 못하고 북받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있는 세연이 통곡소리를 멈춘 것은 요란한 벨소리 때문이었다. 또 누구인가 하는 생각에 세연은 비좁은 냉장고 앞을 지나 현관으로 다가갔다.'“누구세요?”'목소리가 갈라진 게 느껴졌지만 어떻게 가다듬을 새도 없었다. '“문 좀 열어보지 않겠어요?”'주공아파트의 얇은 철문은 바깥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고 있었다. 나이든 어른의 습기 먹은 목소리가 세연의 날선 신경을 조금 안심시키려는 듯 들렸다. 세연이 주저하면서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언뜻 보아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하얀 백발을 잘 넘기고 정장을 잘 차려입은 노인이 손에 갈색의 서류봉투를 들고 서있었다.'“누구…… 시죠?”'세연은 노인의 인상이 전혀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경계를 풀지 못하고 쭈뼛 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좀 들어가도 될까…….아가씨, 이름이 권세연 아닌가?”'“그건 그렇지만.”'단지 이름을 안다고 낯선 사람을 아무도 없는 집에 들이기가 주저하는 빛이 가득하자 노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나를 기억 못 하는구나. 15년 전 인가. 여기 이사 오기 전에 신길동 집에서 너희 집에 누워있던 사람이 기억 안나니?”'“아……. 그 연희동 할아버지 맞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