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 계시오? 장희재올시다!”'장희재가 방 앞에 다가가 규원을 부르자 규원이 방문을 열고 나와 장희재와 마주보고 섰다.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단아한 자태로 뜰로 내려선 규원을 보고 한때 도성안 모든 여인을 희롱하던 한량 장희재가 얼굴색까지 붉히며 그녀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그래…… 어찌 결정하셨소?”'“저는…….”'규원은 장희재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듯 비켜섰다. 뭐라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하는 것이 보는 이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아니, 되었소. 내 물색없는 이가 아닌데 이리 마음을 끊어내지 못하고 결국 부인께 이런 꼴까지 보이는구려!”'“영감!”'“나도…… 알고 있소. 그대가 정인을 그리 가벼이 마음에서 내 놓는 이였다면 그대를 내가 연모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대가 비록 지금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이리 지내고 있지만, 상제 그 사람을 마음에서 내어 놓을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데 잠시 내가 욕심을 내었었소. 이제는 부귀영화(富貴榮華)도, 권세(權勢)도 줄 수 없는데 이리 쫓기는 신세가 되어서도 어찌 그대를 탐하는 마음을 놓지 못한 것인지…… 미안하오. 결례가 많았소! 그런데, 부인!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말이오. 내 절대 이번 생처럼 악행(惡行)을 일삼지 않고 어질고 올 곧은 선비로 살고 있을 터이니 그때는 부디 계한 그 사람이 아닌 내게 와 주실 수 있겠소?”'“영감!”'“그도…… 아니면 다음 생엔 내 누이동생이라도 되어 주실 수 있겠소? 그래서 내가 정성을 다해 그대를 보살펴 줄 수 있게…….”'“영감…… 그리 말씀 하시지 마십시오. 제가 이생에서도 아무런 약속을 드릴 수 없는 처지인데 하물며 다음 생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부디 목숨만은 보존하십시오! 그리고 명으로 가셔서 부디 다시 힘을 얻어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다시 돌아오시면 절대 사람들을 괴롭히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마십시오. 그것이 제가 영감께 바라는 바입니다.”'“고맙소. 나를 걱정해 주시는 그 마음만으로도 난……. 되었소! 다시 돌아온다면 부인 말처럼 그리하며 살겠소!”'“그럼, 살펴 가십시오. 영감께서 제게 주신 그 마음은 제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고맙소! 그리 말해 주어 정말 감사하오! 부디 건강히 잘 계시오. 그리고 계한 그 사람 너무 탓하지 마시오! 사내라는 자들이 본디 그런 자들이니…….”'“예. 영감…….”'그리고 장희재는 돌아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일은 한순간에 일어났다. 갑자기 들이 닥친 군졸들이 장희재를 잡기위해 달려 들다보니 규원이 군졸들에게 부딪혀 한쪽으로 밀쳐지게 되었다. 그리고 곧 무자비한 자들이 규원을 밟고 지나 갈 것처럼 줄지어 달려들고 있었다. 규원과 장희재의 대화를 듣고 서 있던 계한이 놀라 달려 나갔을 때, 장희재가 자신의 앞에 칼을 들이대고 있던 군졸의 칼을 뺏어 들고 달려가 규원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규원의 앞을 가로막고 나서 그녀를 보호하던 장희재의 심부에 희고 번뜩이는 칼날이 꽂히고 말았다. 그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핏줄기가 마치 폭포처럼 넘쳐흘렀다. 순간, 계한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신의 배에 칼이 치고 들어오던 그 찰나, 수만 가지의 생각들과 규원과 자신이 보낸 지낸 세월, 그리고 길모퉁이에 숨어 수하의 칼에 쓰러지고 있는 자신을 보며 웃고 있던 장희재의 모습이었다. 잃어버렸던 지난 2년간의 기억이 물밀듯이 다시 돌아와 계한은 당황스러웠다. 가문을 그리 무너뜨리고 부친을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마저 죽이려 했던 장희재였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던 그가 지금 규원을 위해 대신 목숨을 걸고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상황이 계한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의 그 처절하리만큼 진심된 행동이 그간의 모든 은원을 잊어버리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규원을 대신해 칼을 맞은 장희재의 용기가 계한의 얼어붙은 마음과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달려간 계한이 규원의 몸을 안아 들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 사방에서 장희재를 향해 칼이 뻗쳐 왔고 결국은 장희재는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찌른 사람들도 찔린 사람도 한순간 일어난 일이라 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겨우 진정한 군졸들과 계한이 장희재가 쓰러진 곳을 바라보았을 때, 장희재 그가 규원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얼굴 가득 피를 흘리면서도 입가엔 아름다운 미소가 가득했다.'‘잘 계시오! 부디 다음 생엔 내 누이동생이라도 되어 주시오!’'그 눈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장희재는 자신이 처음으로 마음에 들인 여인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방패삼아 규원 그녀를 지켰다는 안도감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숨줄을 놓고 말았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그날 군졸들의 발부리에 밟혀 아이도 규원도 잃어버릴 뻔 했다. 그리 무도하기로 소문난 그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규원을 지켜 주었다는 사실에 계한은 고개 숙여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