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혜윤이 좋아하지?”'한동안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위치했다. 침묵 건너편의 그는 여유로웠고, 침묵에 잠긴 나는 초조했다. 그동안 그녀를 향한 나의 감정을 꼭꼭 숨겨 놓았기에, 그것을 펼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일 분도 안 되어 어떻게 할지 결심했다.'“아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풋! 사랑?”'“그래, 혜윤이는 내가 이런 거 몰라. 너도 아는 척하지 마. 걔가 알면, 아마 도망갈 거다. 아직은 내 마음을 고백하기에는 이르다는 거, 나도 잘 안다.”'내가 비장하게 말하는 것과는 달리, 이강은 대답 대신 콧방귀를 뀌며 여유롭게 술을 들이켰을 뿐이었다. 그가 한 살 위라는 것을 혜윤을 통해 듣긴 했지만, 그의 태도는 어린 학생을 보는 선생과도 같았다.'“너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희곡 알지? 넌 그 이야기 어떻게 생각하냐?”'“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난 말이야, 그 희곡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애절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오히려 바보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한다.”'이강은 내가 하는 질문은 무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내가 영문학을 배울 때, 고전 영문학 선생이 우리한테 그 둘이 사랑에 빠졌을 때의 나이를 아냐고 묻더라고. 그 선생 말로는, 줄리엣이 로미오를 처음 보고 사랑에 빠졌을 때는 14살 생일 전날이었다고 하더라. 한국 나이로 16살이 안 된 나이지. 선생 말의 요지는, 그들의 나이가 젊다고 말하기도 어색할 정도로 어린 나이였다는 거야.”'“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빙 둘러 말하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나이 운운하는 그를 보니, 대강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를 채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는 또 내 말을 무시하고 빌어먹을 희곡 이야기만 했다.'“셰익스피어가 글을 미려하게 쓰고 잘 포장해서 그렇지, 단순히 보면 걔들만큼 미련스럽고 코믹하게 사랑한 사람들도 드물 거야. 서로 보자마자 하루 만에 사랑에 빠지고, 상대방의 집안이 자신과 원수지간인 줄 뻔히 알면서도 자기들끼리 다음 날 결혼하고, 그리고 로미오는 줄리엣이 약 먹고 죽은 척한 것을 오해해서 자살하고, 깨어난 줄리엣은 죽은 로미오를 보고 따라 죽고……. 참, 미련의 압권 아니냐?”'그는 내 의견을 묻고 있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남자만이 느낄 수 있는 계급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보다 위였다. 그는 내 상관이었고, 나는 그의 명령을 듣는 부하였다. 거대한 산과 같은 이강 때문에, 나의 호기는 점점 줄어들었다.'이강은 대답 없는 나를 빤히 보더니 팔짱을 꼈다. 그리고 고개를 하늘을 향해 올리고 눈을 감았다. 곧, 공중에 그가 말하는 연극 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토록 사랑하던 로잘린을 그다지도 쉽게 잊을 수 있다니! 젊은이의 사랑은 참된 마음에 있는 게 아니고, 눈 속에 있도다!”'대사가 끝나자, 그는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웃었다. 이번에 그는 한쪽 입술뿐 아니라, 입가 양쪽 모두를 말아 올리며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웃었다.'“이 대사는 로렌스 신부가 로미오에게 한 말이다. 하루 전만 해도 로잘린과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고민하던 로미오가 파티에서 줄리엣을 보자마자 다시 사랑에 빠지니까, 변덕스러운 젊은 로미오의 모습을 보고 늙은 신부 로렌스가 한탄하는 대사다. 이 대사도 좋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대사는, 로렌스 신부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혼 주례를 해 주고 난 후에 했던 독백이야.”'이강은 다시 눈을 감고, 한 손에 작은 소주잔을 들었다. 어스름한 놀이터 벤치에서, 그는 또 카리스마를 잔뜩 머금은 배우가 되어 로렌스 신부의 대사를 읊었다.'“격렬한 기쁨은 격렬하게 끝나는 법. 마치 불과 화약의 사이처럼 닿는 순간 날아가 버린다. 지나치게 달콤한 꿀은 달콤하기에 도리어 싫증이 나고, 맛을 보면 식욕이 사라져 버리지. 그러기에 사랑은 적당히 해야 한다. 생명이 긴 사랑은 모두가 그런 법이다. 서둘러 가는 것은 천천히 가는 것보다 못한 법이니…….”'말끝에 여운을 주며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아까보다 더 커 보이는 이강 때문에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어때? 주인공 로미오와 줄리엣이 지껄이는 사랑의 대사보다, 늙은 신부의 대사에서 훨씬 인생의 맛이 느껴지지 않냐? 내가 볼 때 슬픈 사랑 이야기의 탈을 쓴 우스꽝스러운 희곡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로렌스 신부 하나라고 생각한다.”'이강이 천천히 소주병을 기울이는 동안에도, 나는 내 앞에 있는 잔을 한 번도 들지 못했다. 그저 그를 바라보며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난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말이야, 수명이 짧아서 조혼이 성행했던 중세라도 말이야, 걔들 나이가 16살이 아니라 20살만 됐어도 그런 미련스런 사랑을 했을까?”'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점점 만만치 않은 이강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는 혜윤과 마찬가지로 영리하고 똑똑했다. 그 둘은 외모만 닮은 게 아니었다.'“너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이지?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나이. 한국 나이로 18세인가? 흠…….”'이미 그가 말하고 싶은 말을 깨달았기에, 그가 내 나이를 언급했을 때는 시선을 밑으로 향했다. 내 몸짓이 몹시 기분 나쁘다는 표현이었는데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네가 나보고 제비라고 했는데, 반은 맞다. 지금까지 인종 가리지 않고, 여자라면 다 만나 봤어. 뭐, 숨기고 싶진 않다. 나도 내 철학이 있어서 여러 여자들 만나는 거니까. 근데 말이야, 그런 내 눈에는 너도 나랑 같은 종류로 보이거든? 너도 네 또래 남자 애들에 비해 경험이 좀 있는 놈일 거야. 맞지?”'“부인 안 해. 내 주변에 여자 애들이 꽤 있었어. 하지만, 난 혜윤이를 내 주변에 얼쩡거리는 여자 애들과 같이 보지는 않아. 난 혜윤이를…….”'“풋! 설사 네가 혜윤이를 그렇게 본다고 해도, 걔는 널 상대하진 않을 거야. 왜냐하면, 혜윤이는 너나 나 같은 남자가 다가가도 틈을 보여 주는 타입은 아니니까 말이야.”'이강은 술을 그의 입 안에 털어 넣느라 말을 멈추었고, 나는 여전히 한 잔도 마시지 못하고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보기만 했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감 때문인지 그의 얼굴에는 열기가 점점 타올랐지만, 내 얼굴의 핏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