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탁 트인 초록색 벌판에는 바람 한 점이 없었다. 멀리 푸른 하늘 위를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의 그림자가 원래의 크기보다 더욱 큰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드넓은 잔디밭에는 중년을 훌쩍 넘긴 남자가 이제 막 어드레스(골프에서 공을 치기 전에 발 자세를 잡고 클럽을 땅에 댄 자세)를 준비하며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현재 샷을 하기 직전인 남자보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몇 명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나이스 샷!”'남자가 친 공이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 높이 날아가자 그 뒤로 남자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오랜만에 나오셔서 못 칠 거라고 하시더니 엄살이셨나 봅니다. 총재님.”'손인준 의원은 함빡 미소를 지으며 지금 막 멋진 풀스윙을 성공시킨 박웅천 총재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 뒤로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총재님 골프 실력에 대해서는 익히 소문을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하하. 이런. 두 의원들께서 날 아주 하늘로 날려 보내려 작심들을 하셨군. 하하하.”'박 총재는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그라운드 위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인준 의원과 이종학 의원도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마치 이미 의논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손인준 의원은 이종학 의원이 박 총재의 옆으로 설 수 있도록 반걸음 뒤로 물러서 걷기 시작했다. 결국 자연스럽게 이종학 의원은 박 총재의 바로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날도 좋고, 스윙도 생각만큼 멋지게 했고, 이제 이 의원의 용건을 들어보고 싶은데…….”'박 총재의 말에 이종학 의원은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제게는 더없이 좋은 날이지 싶습니다. 총재님께서 기분이 좋으시다니 저의 입도 조금은 가볍게 떨어질 듯하고…….”'“뭐가 그렇게 어려운 말을 하려고 내 기분까지 신경을 쓰는지 정말 궁금하군.”'박 총재의 의아한 표정을 보며 이종학 의원은 다시 웃었다.'“돌려서 말하지 않겠습니다.”'이종학이 걸음을 멈추자 박 총재도 덩달아 멈춰 섰다.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왔다. 이종학은 그 부드러운 바람이 잠시 자신의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국민당에서는 차기 대통령감으로 누구를 생각하십니까?”'흠칫. 박 총재가 놀란 얼굴로 이 의원을 바라보았다. '대통령? 이게 무슨 소린가? 이종학 의원과 골프 약속을 잡고 난 후부터 며칠간, 과연 이 의원이 도대체 무슨 긴한 할 말이 있을까? 생각을 해보기는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종학 의원은 박 총재의 의외라는 표정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제가 알기로 국민당에서는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 인물을 은밀히 물색 중이라 들었습니다.”'이번에는 박 총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최측근들만 아는 기밀사항이었다. 국민당 내부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 인물이 없다는 판단 하에 박 총재는 은밀하게 차기 대통령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아직 선거일까지는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남았고, 적어도 6개월 안에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찾아내어 국민당에 영입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자유당의 이종학 의원이 알고 있단 말인가?'“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지는 마십시오. 제 나름대로 루트를 통해 알아낸 사실이지만 총재님께 알려드릴 생각은 없습니다.”'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이종학 의원을 바라보며 박 총재의 속은 더욱 언짢아지고 있었다. '나름의 루트라는 말이 더욱 기분 나빴다. 내가 안고 있는 바가지 어딘가에서 물이 새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허허, 난 금시초문인데 그런 말이 도나?”'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되묻는 박 총재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뾰족한 말투가 이종학 의원의 말에 꽤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런데, 이 의원께서는 왜 그런 말에 신경을 쓰시지?”'박 총재의 진지한 태도에 이 의원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비록, 박 총재가 질문에 수긍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종학은 이미 그것조차도 짐작했다는 듯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혹시 아직 총재님의 마음에 차는 후보를 찾지 못하셨다면 제가 차기 대통령이 될 인물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하! 박 총재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차기 대통령 후보감도 아니고,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인물도 아니고, 뭐? 차기 대통령이 될 인물? 이런 방자한 사람을 봤나!'“허허. 이런. 이 의원, 그동안 국회 밥을 너무 드셨군. 내, 이 의원을 그렇게 안 봤는데 꽤 자만하구먼.”'한마디로 건방지다는 말이었다. 박 총재의 웃음 속에 깃든 의미를 이종학 의원과 반걸음 떨어져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손인준 의원, 모두 이해했다. 하지만 이 의원은 이정도 반응쯤은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미소를 지으며 가지고 온 패를 내놓았다.'“우선 그 사람에 대해 조사하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만날 의향이 있으시다면 제게 연락을 주십시오. 어떻습니까?”'박 총재는 너무도 자신만만해하는 이종학을 가만히 응시했다.'“이 의원이 이렇게나 자신감을 비칠 인물이라는 뜻인가?”'이 의원의 고개가 살짝 흔들렸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자신만만한 미소가 거짓이 아니라면 이 의원이 말하는 그 사람은 대단한 인물이라는 뜻이었다.'“조사를 해보시면 만나고 싶으실 테고, 만나시고 나면 욕심이 나실 겁니다. 총재님이시라면 분명히.”'‘총재님이라면 분명히 그의 진가를 알아보실 겁니다.’'이종학이 끝내지 못한 말을 박 총재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자신감을 넘어 대단한 확신이었다. 박웅천 국민당 총재는 자유당의 실세, 이종학 의원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대통령이 될 인물이라…….'박 총재의 진지한 목소리가 물었다.'“그가 누구요?”'이종학 의원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지며 그 틈으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박 총재의 귀를 파고들었다.'“자유당 소속, 서태환 의원입니다.”'저 멀리 커다란 나무 위에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