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유인영, 일어나 얼른.”'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옅은 꽃 냄새가 풍겨지며 아직도 어두운 방 안 구석 작은 침대가 잠시 꿈틀거렸다. 문소리를 들었음이리라. '인서는 잠시 망설이다 긴 한숨을 내쉬며 살며시 이불 끄트머리를 잡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반응은 더욱더 움켜쥐고 당기는 이불만이 돌아올 뿐이다. '“인영아 미안한데 그래도 어쩌니. 일어나기 싫으면 늦지 않게 예인이만 챙겨. 밥은 다 해놨으니까 챙겨 먹여서 꼭 어린이집 보내고 학교 가야 한다. 미안해.”'이제 고2인 동생은 욕심이 많아 아마도 밤늦게까지 공부에 매달렸으리라.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른 아침에 깨우는 것이 더욱 미안해지는 인서였다.'“언니, 나 오늘 일찍 학교 가야 하는데. 에이…….”'졸음 가득한 인영의 말에 인서가 더욱 미안한 얼굴을 했지만, 아직도 어두운 방 안의 기운 덕에 보이지 않고 그저 가볍게 인영의 엉덩이를 두드리는 손길에서 묻어날 뿐이었다.'“미안해. 그래도 어쩌냐. 하필 별장에 사람들이 온다잖아. 아침 일찍 가서 준비하고 논에도 잠깐 들러야 하고……오늘만 봐주라, 응?”'인서의 사정어린 목소리에 인영의 긴 한숨이 따라왔다.'“알았어. 알았다고. 에이…….”'투덜거리는 인영이지만 아마도 잘 챙겨 보내리라. 이내 이불 속으로 더욱 파고드는 인영의 모습을 잠시 바라본 인서가 소리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예인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린이집에 입고 갈 옷과 가방을 챙겨 머리맡에 놓아두었다.'아직도 꿈나라를 헤매는 듯 앙증맞은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쪼그리고 잠든 예인의 모습은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예쁘고 귀여웠다. 그런 예인의 작고 하얀 이마에 조심스러운 입맞춤을 한 인서는 바쁘게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4시 반이었다. 여름이라 벌써 동이 트고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아직 휴가철도 아닌데 왜 갑자기 온다는 것인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별장주인에게 잠시 짜증이 일었지만, 황급히 고개를 저은 인서는 그런 배은망덕한 생각을 지워버렸다.'“유인서, 네가 이제 살 만한가 보네.”'스스로를 향해 애꿎은 타박을 주며 기운차게 움직이던 인서가 아직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예인의 모습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어느덧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상은 환한 빛으로 가득했다. 인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오늘도 새벽의 깨끗한 공기와 향긋한 풀 냄새가 가슴가득 밀려들어 한결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이 아침의 상쾌함도 곧 떠오를 태양에 의해 신기루처럼 사라지겠지만, 지금은 온통 자신이 이 신비로운 세계에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에 인서의 얼굴엔 잠시 꿈꾸는 듯이 몽롱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제정신으로 돌아온 인서는 제법 길어진 머리를 검정 고무줄로 단단히 여미고 모자를 눌러쓰고 이미 환갑을 지나 꼬부라진 노인네 같은 포터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여전히 오랜 해소기침을 앓고 있는 노인네처럼 힘들게 헐떡이며 어렵게 시동이 걸리자, 잠시 인서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어렸다.'“해비야, 오늘도 부탁해. 물론 힘든 건 아는데 조금만 참아주라. 솔직히 너도 폐차장으로 끌려가는 건 싫잖아. 우리 좀 더 사이좋게 오래도록 지내보자고. 응?”'알아듣지 못하는 고철에게 중얼거리는 말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제정신이냐고 하겠지만, 인서는 이미 폐차할 시기가 지난 해비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의 포터가 이해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버릇처럼 테이프를 돌리자 밖에서 울리는 매미소리와는 다르게 청아한 목소리의 가수가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한 번도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해 본 적 없는 인서가 왜 이렇게 이 노래를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처음 듣고 반해 항상 차 안에서 듣는 노래였다. 그럴 때마다 궁상떤다는 인영이의 구박에도 꿋꿋이 인서는 버릇처럼 이 노래를 들어야 하루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이었다. '“진짜 이 아줌마 목소리는 죽음이야. 들어도 어쩌면 이렇게 좋을까?”'정말 들을수록 좋았다. 처음 이 가수를 알고 그 다음은 아예 테이프이며 시디며 음반이며, 죽어라 모아서 듣고 또 듣고 해서 늘어난 테이프도 장난 아니게 많았다. '“어……누구지? 저기 우리 논인데…….”'항상 별장을 갈 때면 지나치는 논둑 위에 누군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인영(人影)을 발견한 인서가 인상을 써가며 눈을 모아 자세히 살폈지만, 희뿌연 모습만으로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그냥 지나칠까 하던 인서는 자신의 논임을 상기하며 얼른 차를 갓길에 대고 부지런히 논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하얀 여름 모시 한복을 차려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논둑에 쭈그리고 앉아 멍하니 이제 제법 자란 벼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인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얀 한복에 맞추어 중절모까지 챙겨 쓰신 할아버지의 모습은 분명 처음 보는 분이었다. 나고 자란 이 동네에서 인서가 모르는 분도, 인서를 모르는 분도 없었다. '“저기……어르신?”'묵묵히 쪼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에도 왠지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위기가 가득해, 은서는 자신의 논임에도 낮고 공손한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노인을 불렀다.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음인지 미동도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앉아있는 노인의 모습에 조금 더 목소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노인의 얼굴이 서서히 인서를 향했다. 인서가 조금 멋쩍은지 헛기침을 하며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