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조각조차 품지 않은 하늘은 시리게 푸르렀다. 그 푸름에 당장 소낙비가 내리길 바라는 짓궂은 심술이 생긴다. 제 마음은 짜증 한가득 이건만 하늘은 저토록 맑기 때문이다. 눈을 돌린다 하여 제 앞에서 농성하는 신하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알기에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대들은 짐에게 무엇을 원하는가.”'“세를의 어미를 원합니다.”'원로대신이자 이 농성의 우두머리인 가스벨 백작이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지금까지 폐하께서 이루어내신 업적이 어마하다는 것은 전 대륙이 아는 사실입니다. 허나, 황궁의 안정만큼은 폐하께서 홀로 해결하실 문제는 아닙니다. 예부터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가정이 기본입니다. 제 아무리 지붕을 화려하게 짓는다 해도 기둥이 없으면 지붕은 있을 가치가 없습니다. 결코 집이라 부르지 못합니다.”'“가스벨 백작. 그대의 혓바닥 놀음에 짐의 업적이 한순간에 가치 없는 지붕으로 전락하는군. ……아주, 재미있는 주장이야.”'가스벨은 주제를 넘었다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요리조리 빼는 황제에게는 무대포 공격이 제격이었다.'“그만큼 황실과 후계의 안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무례함을 너그러이 용서하시옵소서.”'카르딘은 삐뚜름한 자세로 회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실내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카르딘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자 자세부터 똑바르게 앉았다. 신하들은 그가 한마디 할 것을 예상하고 모두들 몸가짐을 바로잡았다.'“황실의 법도라면 황후의 간택은 황실 어른의 주도하에 이루어져야 할 일. 허나 황실 어른이 곧 짐이라는 것을 그대들도 잘 알 것이다. 그러하니 짐의 뜻대로 황후를 간택하려 한다.”'한 달간의 농성 끝에 얻은 결과물이다. 그러나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떨떠름했다. 그가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게다가 제 자식 앞가림도 못하는데 남의 자식 일에 나서는 것이 좋은 모양새는 아닐 터. 그대들은 간택령이 끝나는 순간까지 잠자코 있도록.”'제 할 말을 마친 카르딘은 황좌에서 일어섰다. 카르딘이 회의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인식한 신하들은 아까의 농성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시끄럽게 ‘폐하’만을 외쳤다.''카르딘의 기묘한 주문과 함께 긴급 소집 명령 또한 떨어졌다. 중요 직책급에 속한 대신들이 하나 둘씩 신속하게 입궁하였고 목적을 알 수 없는 긴급소집에 누구보다도 먼저 눈치 채기 위해 서로만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이 모임의 목적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카르딘이 회의실로 들어섰다.'“아, 지금쯤이면 즐거운 저녁식사를 할 시간이겠군. 일이 이렇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네.”'떨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대신들과 시선을 교환했다.'“오늘 긴급 소집의 목적은 단 하나다. 짐의 옆을 지켜줄 여인을 결정하기 위해서다. 사실 공정함이 한 치에 어긋나지 않도록 성심성의껏 나 혼자 그리 한다 하여 남이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카르딘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을 불렀다. 회의실 정 가운데에 원형 탁자가 세워지고 그 위에 준비해두었던 종이쪽지들을 뿌렸다. 어떤 쪽지들은 힘에 밀려 탁자 밑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쪽지는 다른 쪽지에 밀려 떨어지기도 했다. '“여기 탁자 위에 있는 쪽지들은 그대들의 가문이 적혀있다. 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딸’이 있는 집안이지. 자, 이제 뽑아볼까.”'능글맞은 눈웃음과 함께 카르딘은 탁자 위에 있는 쪽지 하나를 들었다. 접힌 종이를 펼쳤다.'“카스타.”'대신들은 이제야 그의 행동을 이해하고 나자 그의 입에서 나오는 가문 이름에 집중했다. 9가지 가문 이름이 공표되자 대신들의 표정이 제각각으로 변했다. '“이 제비뽑기에 의문이 드는 자가 있다면 직접 와서 눈으로 보도록. 이 선택에는 어떠한 술책도 쓰지 않았음을 짐의 이름을 걸고 선언하지. 이상 긴급 소집은 끝났다. 집으로 가 오붓한 저녁식사를 만끽하도록.”'제 할 말만 마친 카르딘은 회의실에서 벗어났다. ''“준비가 다 되어가는군.”'9번째 입성소식에 카르딘은 씩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 또한 운 하나는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문이 대신 무리가 반발하지 못할 정도로 권력 분배에 알맞게 뽑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하나. 마를린. 그곳은 예상 밖이라 해야 하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가문의 존재를 쪽지를 펼쳐들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서 인지 더욱 마를린이 궁금해지는 카르딘이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카르딘은 허락을 내렸다. '“폐하, 마를린 담당이옵니다.”'“그런데?”'“마를린 영애는 오래전 사망하였다 하옵니다.”'죽었다라. 마를린의 여식이 이미 죽었다라. 카르딘은 참다 참다 못해 웃음을 터트렸다. 고인을 향한 예의가 아닌 것을 알지만 제일 관심이 갔던 그 마를린이 이런 결과를 안겨주니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기가 어려웠다. '“그래서?”'“여기 편지를 전해달라고.”'매화모양이 찍힌 압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고고하면서도 귀여운 꽃 모양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안에 들어있던 종이를 펼쳐들어 빠르게 읽었다.'“……데리고 와라.”'“네?”'“이 편지를 쓴 사람을 데리고 와라 하였다. 가족을 잃은 마음이 안타까워 짐이 직접 위로해주겠다는 차원에서 말이다.”'“바, 받잡겠사옵니다.”'서둘러서 나가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카르딘은 편지를 다시 보았다.'“적어도 자작 본인은 아니군.”'조그마한 땅덩어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다른 사람이 자작을 사칭하려고 들었을까. '“자작이라고 속여야 하겠는데, 도덕적인 인간이라 완벽히 사기 치지는 못해.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말투로 이 편지를 썼다 말이야. ……차라리 눈 딱 한번 감고 자작인 척 하시지. 그랬다면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때 아닌 재미에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내 옆자리가 그물이었는지는 몰랐군. 그것도 상당히 촘촘한.”'제 손 끝에서 나오는 결과들을 지켜보는 것만큼이나 흥미 느끼는 것이 스스로에게 미안할 정도다. 그렇다고 멈출 생각도 없지만. 짓궂은 사내아이처럼 낄낄대며 웃었다.''“왜 그동안 짐의 옆자리를 비워둔 지 아느냐.”'카르딘은 오른손을 뻗어 소년의 턱을 매만졌다.'“남들과는 독특한 취향 때문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여전히 무표정이다. 소년의 고개가 돌아갈 것을 예상하여 카르딘은 소년의 턱을 움켜잡았다. 숨이 절로 막힐 정도로 느릿하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노골적인 태도에 시선을 돌릴 법도 하지만 소년은 그의 시선을 피하기는커녕 맞서 겨누었다. 카르딘은 속으로 혀를 찼다. 조금만 휘어진다면 누가 뭐랄까. 대나무보다 더한 꼿꼿한 태도에 꺾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독특한 취향이라는 것은.”'소년의 아랫입술에 카르딘의 윗입술이 스치었다. 소년의 얼굴에서 불과 한 뼘 거리를 두고는 입을 열었다. '“남장한 여자를 말한다. 왜냐하면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그 쾌감이란, 아주 짜릿하기 때문이지.”'드디어 소년의 얼굴에서 변화가 일었다. 고운 눈썹이 꿈틀거리는 정도였으나 여태 어떠한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했던 그로선 값진 결과물이었다.'“먼 곳에서 왔으니 몸이 노곤할 것이다. 오늘은 푹 쉬도록.”'카르딘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소년은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문고리를 돌렸다.'“황제모독의 형벌이……, 기억이 나지 않는군. 도통 그런 죄인을 찾아볼 수 있어야 말이지.”'소년의 손놀림은 거침없었다.'“아,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데, 그대의 비린내는, ……참으로 향기롭더군.”'문이 닫히자 소년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카르딘은 낄낄거리며 서류를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