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쿵…….'너무나 활기차게 뛰는 소리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소리를 따라 걸어갔다. 알 수없는 그 소리가 나를 이끌었다.'병원복도 끝. 소위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특실. 내가 살아있던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구경조차 못한 곳이었는데 저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나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202호실. 연리지 25/F 이라는 명패가 눈에 띄었다. 지난 30년 동안 나의 기억 속에 단 한 번도 만나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도 왜 나를 부르는 무엇인가가 저 안에서 들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주뼛거리며 문 앞을 서성이는 내 귓가에 와 닿는 나이든 여자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아가씨…….”'“…….”'“우리 아가씨 어째…… 심장이식 수술만 받으면 금방 좋아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어려운 수술까지 견딘 분이 왜 눈을 못 뜨시는 건지…… 아이고, 회장님 사모님 전부 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에요. 그러니 제발! 눈 좀 뜨세요. 리지 아가씨!”'그녀의 목소리가 나를 이끌듯 병실 안으로 들어가게끔 했다. 조용하고 깨끗한 병실. 은은한 병실 안의 가구들과 베드에 누운 여자가 덮은 이불보가 너무 편안하고 안락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연한 초록빛의 일색. 마치 새봄을 준비하는 아이들의 소풍처럼…… 그렇게 따뜻하고 죽음과 상관없는 따뜻한 병실 분위기에 난 온몸에서 긴장감이 풀리는 것 같았다. 나이 든 여자가 베드에 붙어 앉아 불안해하며 누워 있는 여자를 간호하고 있었다. 하얗다 못해 파리한 여자의 얼굴은 흑백사진 속의 전형적인 미인의 얼굴이었다. 내가 평소 부러워하던 길고 짙은 속눈썹과 하얗고 넓은 이마, 그리고 오뚝한 코와 작고 예쁜 라인의 입술, 그리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우아함. 난 그녀의 곁에서 여자의 얼굴을 보며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나를 흠칫 놀라게 했다.'‘내 심장이 그녀의 몸속에 있다’ '내가 죽은 지 1시간도 안 돼 나의 몸을 해부하고 나의 심장을 가져간 그들이 아마도 저 여자에게 심장을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왜 이제야 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것은 내 심장이 죽지 않고 뛰는 소리였던 것이다. 난 병실 바닥에 주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의 몸속에 나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녀의 파리한 입술에 피를 돌리고 그녀의 몸속으로 열심히 심박운동을 하며 그녀를 되살리려 움직이고 있었다.'내 몸은 이미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내 몸의 일부분은 다른 이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일부가 되어버린 현실을 어찌해야 할까? 앞으로 나는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돌아갈 수도, 남아 있을 수도 없다면…… 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결국 난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단 말인가? 이준서라는 남자에게 자신을 위해 이 세상을 살다간 나란 사람의 진심과 나를 그렇듯 처참하게 다룬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는데…… 난 그냥 그녀의 병실 벽에 붙박이라도 된 듯 그렇게 앉아 있었다.'''벌써 이틀이나 지나 버렸다. 연리지라는 이 여자는 아직도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다. 그녀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걱정하고 안쓰러워하는 것을 지켜보며 난 그녀가 너무나 부러웠다. 내 심장을 가진 여자 연리지는 그렇게 나와는 처음부터 격이 다른 별세계의 공주인 것 같았다. 이곳에 온지 벌써 이틀째. 내 갈 길을 가야 하지만 아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녀가 내 심장에 적응해서 눈이라도 뜨는 것을 보고 가고 싶었다. 이미 내 몸의 껍데기는 이 병원 지하 귀퉁이에 냉동되어 의대생들의 인체해부실험의 대상이 되기만 기다리고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유일한 껍데기조차 얼마 있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지치고 힘들어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도 귀찮아졌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죽은 자들이 있는 곳,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길 뿐이다.'‘잠깐! 잠깐만요!’'희미하지만 나를 돌아다보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틀 동안 거부 반응은 없었지만 움직임조차 없던 내 심장의 새로운 주인인 연리지.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드에 누워 힘없이 축 늘어진 손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는 너무나 맑고 깨끗했다. 마치 세상을 모르는 아이같이 맑은 눈동자에 이끌려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우리 둘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연리지라는 그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난 그녀의 검고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눈물이 가득한 두 눈이 나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내가 보여요?’'난 그녀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나에게 맞춰져 있는 것을 보며 놀라 물었다.'“그래요.”'작았지만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녀가 답했다. 이미 죽은 내가 보인다는 그녀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죽은 자를 보기도 한다는 말이 진실이었나 보다.'‘내가 누군지 알아요?’'“예. 당신이 지난 이틀 동안 하던 모든 말들을 듣고 있었어요.”'‘내 말을 들었다고요?’'“네.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당신이 나를 도와준 것처럼…….”'‘어떻게? 어떻게 나를 돕는다는 거죠?’'“난…… 그래요. 당신이 이곳에 나타나기 전부터, 그러니까 수술 받고 나오면서부터 바로 당신을 느낄 수 있었어요.”'‘무슨 말이죠?’'“당신의 이름, 나이, 살아온 과거, 그리고 배신당한 사랑…… 모든 거…….”'‘어떻게?’'“이상하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당신을 난 모두 알게 되어버렸어요. 지금 당신이 느끼는 고통, 그리고 당신의 안타까움까지…… 아마 당신의 심장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일 거예요.”'‘이……럴 수가’'“그러니 아파하지 말아요.”'그녀의 안에 있는 내 심장이 그녀에게 나를 기억하게 한다는 말은 너무나 충격이었다. 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알몸으로 타인 앞에 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를 향하던 시선을 들어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이제…… 나란 사람은 정말 세상에 없는 거군요.’'“그래요. 그렇지만 당신의 심장과 신장. 안구는 누군가에 또 다른 생을 부여했겠죠. 나처럼…….”'‘훗. 이제 내가 가야 할 곳으로 가봐야겠군요.’'“당신! 그렇게 모든 울분을 삼키고 돌아설 수 있나요?”'‘그럼, 이제 이 세상에서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여기에 남아 무얼 할 수 있겠어요?’'“내가, 당신을 도와주면…… 그러면 안 될까요?”'난 그녀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는지 알면서 나를 도와주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 어떻게 나를 도와준다는 거죠?’'“당신이 내게 제2의 생을 준 사람이니까…….”'‘그래도…….’ '“있죠. 난, 어릴 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아서 움직이는 것 자체도 힘에 겨웠죠. 그래서 거의 매일 병원을 들락거렸어요. 그건 우리 집안사람들만 아는 비밀이다 보니 난 항상 보호 속에서 살아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죽은 자와도 어느 날부터 소통이란 걸 하고 있었죠. 그래요. 당신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거예요. 그런데…… 나도 이건 이해하기 어렵군요. 당신의 심장이 내게로 온 순간, 내겐 당신의 마음이 느껴졌어요. 그래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적 있어요. 예전 나와 같은 심장질환자였던 여자 분이 교통사고로 죽은 한 아이 엄마의 심장을 기증 받고나서 그 기증자의 아이한테 애착을 버리지 못해 그 아이를 납치해 대단한 이슈가 되었었어요. 그 여자의 그런 상태를 의학계에선…… 뭐라더라? 그래. 셀룰러메모리! 맞아요! 우리 몸에 있는 모든 세포들은 그 사람의 '남겨진 기억’이라고 해요. 장기이식 수혜자들에게 기증자의 성격과 습성까지 전이되는 현상을 말하죠. 아마도 우리에게도 그런 일들이 생긴 게 아닐까 싶어요.”'난 그녀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눈이, 표정이 너무나 순수해서 그녀가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말해 주는 듯 했다.'‘그래도…… 당신이 어떻게 나를 도와준다는 거죠?’'“난 우리나라에서 3번째 대기업인 묵호그룹의 상속자죠. 세상 남자들인 모두 침을 흘릴 조건과 당신이 보다시피 난 외양도 괜찮은 유전자 덕분에 시선을 끌게 생겼죠. 그러니 그 이준서라는 작자가 나 같은 여자를 보고 그냥 지나칠 리 없겠죠? 당신이 그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것처럼 내가 그렇게 해주면 좀 아픔이 덜어지지 않을까요?”'과연 내가 원하는 것이 그런 것일까? 준서 씨가 나에게 한 것과 같이 갚아주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일일까? 지난 며칠 동안 갑작스레 일어난 일들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보다 그녀는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고민한 것 같았다.'‘그렇지만 그 사람…… 영민한 사람이라 당신의 진실을 알게 되면 당신마저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내게 그 사람이 한 것처럼 당신에게 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가 없는데…….’'“난 보디가드도 있고…… 그 사람이 함부로 할 수 없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희진 씨! 이대로 죽은 자가 속한 곳으로 가면 난 평생 당신에게 빚을 진 기분으로 살아야 해요. 몰랐다면 모르지만 알고도 그냥 당신을 보낼 순 없어요. 당신이 너무 안타까워서.”'''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민 손을 덥석 잡기도, 그렇다고 뿌리칠 자신도 없었다. 내 안에서 떠오르는 준서 씨에 대한 원망과 그녀 스스로가 내민 손을 포기하기엔 너무나 원통하고 내 지난 삶이 안타까웠다. '‘그럼…… 당신의 도움을 받을게요. 그 대신 힘들어지면 바로 말해요. 포기해도 되니.’'내가 그녀에게로 돌아서면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그럴 일 없을 거예요. 나 보기완 달리 약간 사악한 구석이 있죠. 절대 그런 사람 용서 못해요. 그러니…… 당신은 편안히 있어요.”'하얀 그녀의 얼굴에서 결연한 의지의 빛을 본 듯했다. 내게 주어진 삶은 다 살았지만, 그녀가 나를 대신해서 살아가 줄 것임에 난 그녀 앞에 미소를 지으며 섰다.'‘그럴게요. 난 이제 그만 돌아갈게요. 내 심장이 당신에게 있으니 당신이 곧 바로 나니까 내 영혼은 이제 편히 쉴 수 있겠네요.’ '“그래요. 그러니 산자에 속하지 않은 당신이 이곳을 떠난다 해도 당신은 내 안에서 나를 통해 당신이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을 거예요…….”'그녀의 맑은 눈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죽은 자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이제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나의 협조자를 믿고, 난 모든 것을 버리고 깨끗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잘 가요! 강희진 씨! 그곳에서 편안했음 해요. 당신과 나의 연결고리가 여기 이곳에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연리지가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나는 나의 생에서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불러준 연리지를 바라보며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제 남겨진 내 협조자 연리지만이 나를 이 세상과 소통하게 할 것이다. 그녀 안에 힘차게 뛰고 있는 나의 심장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