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건조하다 못해 퉁명스런 말투에 주차장을 향해 앞서 가던 세영의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눈 꼬리를 치켜 올린 채 세영이 봉팔을 쏘아봤다. 뜨거운 햇살을 한 번씩 올려다보는 그의 입 꼬리를 쳐다보는 세영의 얼굴에 짜증이 배어났다. '그동안 패배자처럼 달고 살았던 짙은 그늘이 그의 얼굴에서 사라진 탓이었다. '“퍽이나 시원한 모양이네?”'“그러는 당신은, 표정이 별로네.”'흐흐. 되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세영의 일그러진 표정으로 보아 기분이 나빠 보였다. 설사 그게 가식이라도 해도 이제는 그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그의 결혼 생활은 오늘로 종지부를 찍었으니까. 이혼이라는 게 이렇게 간단할 줄 알았다면 진작 서둘렀을 것을, 미적거린 게 천추의 한이다. '더 이상 자신을 구속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그렇게 좋니?”'좋다. 호적등본에 줄이 그어진다 해도 좋다. 이미 마음이 멀어진 지 오래였어도 서류상 부부라는 족쇄가 그를 숨 막히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는 것을 왜 몰랐던 것인지, 그토록 피터지게 싸웠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주 속이 다 후련하다!”'이제야 막혔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긴 터널을 빠져 나온 것처럼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유난스레 눈이 부셨다. 봉팔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부셔 똑바로 볼 수 없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징글징글하게 싸우던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치열하게 싸우던 시간에 그가 헛웃음 지었다. 아내의 독설을 다 참아낸 그가 아니던가. 얼마든지 혼자서도 모진 세상을 헤쳐 나갈 수가 있었다. 되레 돈 한 푼 안 벌어본 세영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의문이 들자 그녀가 측은하기까지 했다. '동정심이 다분히 섞인 봉팔의 시선에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지금 날 동정해?”'“내가 왜? 넌 이제 나랑 상관없는 사람인데.”'그의 관심 속에 그녀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에 세영은 기분이 상했다. '“하,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세영의 비딱한 시선이 그의 몸을 훑어 내렸다. 봉팔은 전 같으면 울컥 분노가 치밀어 올랐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로 인해 느꼈던 모멸감과 온 몸을 지배하던 강박관념도 오늘로써 끝장이 났으니까. '“걱정마라. 너만 아니면 돼.”'봉팔의 확신에 찬 말이 세영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혼을 해주는 것은 그녀 자신인데 되레 상황이 바뀌어 그의 당당함만 높여준 꼴이 되었으니 어찌 짜증이 나지 않을까.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그녀가 그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숨겨둔 재산이 더 있는 것은 아니겠지?'“그렇게 가져가고도 미련이 남았니?”'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말에 세영이 눈을 치켜떴다. '“내, 내가 무슨 미련이 남아! 흥, 별꼴이야!”'세영이 바락 소리쳤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꽁수 부리려고 수 쓰는 모습에 봉팔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어리석은 여자 같으니라고. '목안으로 삭이던 그의 웃음은 점점 소리가 되어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세영이 바락 대들었다.'“지금 날 비웃어?”'비웃음이야 그녀가 전문이었다. 그녀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본 사람은 그였다. 그녀를 향해 입을 여는 봉팔의 입가에 냉소가 흘렀다.'“아직도 날 니 남편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서 말인데 예전에 밖으로 던져버린 화분, 경비실에서 곱게 모셔두고 있다더라. 시간 나면 찾아가던지.”'벌써 일 년 전의 일이다. 제 화를 이기지 못해 화분이란 화분은 다 박살을 내더라. 그나마 아파트가 3층이기 다행이지. 언젠가 홧김에 베란다 밖으로 집어던진 고무나무를 친절한 경비아저씨께서 손수 가져다 화분까지 갈아 모셔두셨단다. 그때였다. 그의 고막이 터질 정도의 비명소리가 들린 것도. '“아악!”'분에 겨운 듯 세영이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경비실을 지나칠 때마다 흘끔거리던 시선이 불현듯 떠오른 탓이었다. 불한당 같은 인간. 진작 알고 있었으면서 이제야 말하는 심보가 미워 죽겠다.'그녀가 입에 거품을 물며 악을 썼다. '“그래, 당신 잘났어! 얼마나 잘 사나 두고 보자.”'“그러지 뭐. 모르긴 해도 당신보다 배는 잘 살걸.”'그가 태연자약하게 되받아칠수록 그녀는 미칠 것만 같았다. 눈동자가 빠지도록 그를 째려봤지만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뜨거운 햇살이 마냥 좋은 듯 하늘을 향해 윙크까지 해댔다.'미쳤구나. 저런 사람 상대해봐야 자신의 입만 더러워질 것이다. '그녀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모질게 쏘아봤다. 헤어짐에 대한 인사를 콧방귀로 대신하며 등을 돌렸다. 활짝 편 어깨만큼이나 자신감이 넘쳐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등 뒤로 들려오는 콧노래 때문이었다. '그는 노래를 부를 만큼 그는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에 대해 간과한 게 있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꼿꼿하던 그녀의 걸음은 어느새 비척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도 씁쓸해지긴 마찬가지였다.'‘멍청한 여자야, 당신은. 자신에게 무엇이 소중한지 아직도 모르는 바보 같은 여자.’'보람차고 행복한 인생을 사는데 있어 돈이 최선이 아님을 그녀는 언제쯤이나 깨달을까. 욕심 많은 아내는 재산을 가졌고, 그는 자유를 얻었다. 이보다 좋은 거래는 없었다. 아내가 없어도 그에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이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사내구실을 못한다고 체면이 구겨지는 건 아니란 말이다. 아내는 그런 모양이었지만. '한 번의 이혼으로 방황할 만큼 그는 정신이 나약하지 않았다. 그가 뜨뜻해지는 머리 위를 만지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이 이토록 뜨거웠다는 걸 새삼 깨달은 듯 멍한 시선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진짜 뜨겁다…….”'그러자 시원한 곳을 찾아 무작정 떠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솟아났다. 별거하던 1년 동안 제대로 된 휴식 한 번 취하지 못한 것이 불쑥 떠오르며 그를 충동질 했다. 그러자 더 많은 의미가 붙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기에 앞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휴가였다. 일주일, 아니 단 하루라도 이곳과 멀어진 곳에서 마음을 재정비하고 싶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