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은 침대에 걸터앉아 손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익숙한 재스민 향기를 느꼈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지민이니?”'“…….”'그녀는 투명한 광채를 나풀대며 여릿한 미소를 지었다.'“잘 지냈어요?”'“잘 지냈냐고?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네가 없는데.”'그의 눈빛은 처절하도록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지민은 한발 한발 다가가선 그를 포근히 안아 주었다.'“아니던 걸? 아주 잘 버텨내던 걸. 아주 잘하고 있었어요. 앞으론 더 잘하게 될 거예요.”'“날 보고 있었던 거야?”'“그럼요. 언제나 보고 있어요.”'“지민아, 사실 힘이 들어. 네가 보고 싶어서 힘들어 미치겠어. 이젠 어디도 가지 마. 곁에 있어 줘.”'“아니, 힘들지 않을 거예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날 사랑해줘서. 애타게 기다려줘서.”'지민은 목을 끌어안았던 팔을 느릿느릿 풀어냈다. 그의 슬픔을 다독여 주는 듯한 묘연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불현듯 몸을 돌렸다. '하일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왜? 가려는 거야?”'일순 붙잡아야 된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하지만 온몸이 마비라도 된 양 옴짝달싹을 하지 않았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서글피 지켜봐야만 했다.'그녀는 그의 답답한 심정을 아는 것처럼 사뿐히 내딛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멍하니 앉은 그에게 천사와도 같은 미소를 건넸다.'“행복하세요. 잘 있어요.”'‘뭐?’'하일은 심장이 멎을 것처럼 아려왔다. 목청을 열어 ‘안 돼, 가지 마, 이제야 와 놓고선 어딜 또 가!’라며 고함을 쳐야겠는데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건지 뱉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차츰 차츰 하얀 빛 속으로 파묻혀갔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래! 왜 말이 안 나오는 거야!’'그 순간, 거짓말처럼 목청이 열렸다.'“지민아, 지민아!”'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민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그라지고 휑한 방안 풍경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일은 땀으로 흥건한 얼굴을 쓸어 내렸다. 턱 밑으론 건장한 근육을 따라 굵은 땀줄기들이 쭈르르 흘렀다.'꿈이었다. 2년 만에 다시 보게 된 지민의 모습이었건만 그저 허탈한 꿈이었다. '그는 어금니를 드세게 짓누르며 섬세한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부술 것처럼 억압했다.'‘그동안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다가 잊을 만하니까 와서는 잘 있으라는 말을 하고 가는 거야? 그럴 거면 차라리 오지 말지 그랬어. 이제야 좀 살 것 같은데, 그냥 인사 같은 건 잊어버리지 그랬어. 난 어차피 너와 마지막 인사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데. 널 떠나보낼 준비 같은 건 애당초 하지도 않는데!’'잘 지내는 걸로 보였다는 그녀의 말은 틀렸다. 그저 아닌 척, 이겨낸 척, 잊은 척, 거짓으로 예전 모습을 되찾아 놓았을 뿐이었다. '허황되고 허탈하게, 장난스럽고 익살스럽게, 그렇게, 그렇게 과장된 삶을 살아가는 중이었다.''* * *''하일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샤워기 밑에 섰다. 물줄기들이 검은 머리칼과 반듯한 이마를 뒤덮으며 짙은 속눈썹에 맺혀 눈물방울을 토해내는 것처럼 흘러내렸다. 적시고, 적시고, 적셔들며 쉽게 가라앉혀지지 않을 것 같은 착잡한 마음을 다스려 주었다.'몇 시간 후 그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출근을 했다. 이내 조회를 마치고 회장실을 찾았다. 두 명의 여비서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머리를 수그렸다.'하일은 특유의 환한 미소를 던졌다.'“좋은 아침.”'“좋은 아침입니다.”'오래도록 회장실을 지켜온 김 비서가 밝은 톤으로 넌지시 받아쳤다.'하일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김 비서의 옆에 서 있는 낯선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어디서 나타난 거지?’'자연스레 눈길을 앗아가는 그녀는 새까만 커트머리와 주먹만큼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얼굴, 눈꽃처럼 새하얀 피부와 거슬릴 정도로 도드라지는 입술을 가진 앳된 여자였다. 더불어 흠잡을 데 없는 단정한 차림새였다. 가장 압권인 건 인형 같이 예쁜 얼굴에 미세한 표정 한 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일은 검은 눈빛을 번뜩이며 김 비서에게 물었다. '“신입 뽑았어? 그런 말 못 들었는데.”'“추천만으로 조용히 면접을 봤거든요.”'김 비서는 어느 때보다도 싱그럽게 답했다. '반면 새 얼굴의 여비서는 굳은 표정을 하고 김 비서를 이상스럽게 쳐다봤다. 비서로서의 깍듯한 면모를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 비서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며 아무렇지 않은 음색을 이었다.'“이 비서, 기획실 강 실장님이셔. 아마 자주 뵙게 될 거야. 잘 모셔야 하고. 실장님, 이서원 비서에요. 나이는 스물여섯이구요. 어때요, 예쁘죠?”'“이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