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이 빠지고 난 자리, 끝도 없이 펼쳐진 겨울 갯벌은 거칠다 못해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서해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은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인근의 따뜻한 찻집이나 식당으로 돌려놓기에 충분하였다.'바닷가를 지키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름 모를 커다란 나무 한 그루뿐이었다. 가지만 앙상한 마른 나무는 쓸쓸한 그곳의 풍경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바다를 향해 기울어져 있는 가지들로 인해, 나무는 흡사 바다 너머의 누군가를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보였으나,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해가 서쪽으로 점차 넘어올 무렵 나무 앞에 멈춰선 최고급 세단이, 뒷좌석에서 내린 세련된 슈트 차림의 키 큰 중년 남자가, 그곳에서 딱히 시선을 끌지 못한 것도 이상하리만치 당연했다. 찬바람에 옷깃을 여민 남자는 홀로 선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다녀왔습니다.”'그가 고개를 숙여 보인 것도, 그에게서 흘러나온 말도 뜻밖이었다. 이윽고 나무 뒤에서 들려온 가라앉은 목소리의 물음 역시. '“그래. 확인했습니까?”'“네, 직접 가서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찾으시는 분이…… 틀림없습니다.”'남자의 확신에 찬 대답 이후, 그때까지 홀로인 줄 알았던 나무 뒤에서 가라앉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차에서 내린 남자보다도 키가 컸다. 세운 코트 깃 탓에 얼굴이 반쯤 가려졌음에도 이마, 눈빛, 콧날에서 묻어나는 날카로움과 권위는 숨겨지지 않았다. 지금껏 나무와 바다 사이에서 한풍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을 텐데, 그에게선 떠는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외려 겨울바람보다 더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거제도라고 했습니까?”'“거제도 인근의 작은 섬입니다.”'“그곳에, 왜…….”'차가운 목소리에 일말의 감정이 묻어났다. '“그 섬에, 오래전 혼자된 이모가 살고 있습니다.”'대답을 들은 젊은 남자의 눈썹이 휘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것은 마치 ‘이모라니?’ 하고 소리 없이 되묻고 있는 듯하였다. '“이름 이숙향, 나이 오십. 이십오 년 전 배를 타고 나간 남편이 행방불명된 후 줄곧 그 섬에서 혼자 살아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언니의 딸인…… 진윤수 씨가 보건소로 오기 전까지 말입니다.”'진. 윤. 수. '그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침 더욱 거세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탓이었을까. 추위 탓이었을까. 동공에 물기가 어린 듯 보이기도 했다. 잠시 말이 없던 남자에게서 일말의 떨림을 내포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어때…… 보이던가요?”'“좋아 보였습니다……. 아주.”'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입매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의 젖은 시선이 다시 바다를 향했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다행이네요.”'그것은 마치 혼잣말과도 같았다. 중년 남자도 그것을 아는 듯 안경을 고쳐 쓸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해는 어느새 수평선에 닿을 듯 말 듯 접근해 있었다. 결국 먼저 말문을 연 쪽은 미동도 없이 먼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젊은 남자가 아닌, 추위에 어느새 코끝이 빨개진 중년 남자 쪽이었다. '“날이 찹니다. 차에 타시지요.”'“아니. 전 좀 더 있겠습니다. 먼저 올라가세요.”'“회장님, 큰회장님께서 걱정하십니다.”'회장이라 불린 그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어렸다. '회장님…… 이라. 벌써 취임한 지 2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직함이다. 그 직함을 얻기 위해 그토록 많은 것을 버려야 했건만 정작 그 자신은 여전히 그 가치를, 의미를 인정할 수가 없다. '“저를 한두 해 보시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러십니까. 아버지껜 송 실장님께서 얼마든지 둘러대실 수 있잖아요.”'그를 설득할 요량으로 아버지를 입에 올렸을, 송 실장의 간절함을 뿌리쳐내는 목소리는 단호했다. 업무에 쫓겨 자주 찾지 못하는 대신 한 번 찾게 되면 꽤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지난 몇 년간 그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것을 모를 리 없음에도 괜한 노파심에 그를 설득하려 했던 송 실장은, 결국 한발 물러섰다. '“그럼…… 알겠습니다.”'그 후 아무런 기척이 없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송 실장이 자신의 뒤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싸늘한 명령을 내렸다. '“지난번, 지시했던 일…… 시작하세요.”'“네? 하지만 큰회장님께…….”'또다시 송 실장의 입에서 ‘큰회장님’이라는 호칭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천천히 부하 직원을 향해 돌아선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여 있었다. '“현재 CM의 오너는, 그리고 송 실장님의 상관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 차정혁입니다.”'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 채찍 같은 한마디에, 추위에 움츠러들어 있던 중년의 비서실장의 어깨에 긴장이 스며들었다. 정혁은 그 모습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다 다시금 바다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더 이상 아버지가, 대한민국 아니 세계의 재계를 호령하던 그 아버지가 아님을 알면서. 가끔 송 실장이 아직 과거 속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건 아닌가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니…… 과거를 헤매고 있는 건 자신인가.'오롯이 바다를 응시하고 있던 그의 눈동자에 슬픔의 빛이 어렸다. '“봄이 오기 전…… 보고 싶군요.”'그녀…… 진. 윤. 수. 그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