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분이 저희 호텔에서 제일 바쁘신 총지배인님이십니다.”'리아는 소개 받은 중년 남자와 악수를 나누었다. 털털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총지배인은 인자한 인상을 가진 50대 중년 남자였다. 차례대로 인사를 나눈 프런트 오피스의 캡틴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이쪽은 B/O 식구들입니다. 먼저 재무 관리부부터…….”'수환의 소개를 들으며 직원들과 차례대로 인사를 나눈 리아가 승우의 앞에 섰다. 천천히 시선을 맞춘 그녀의 눈동자에 놀란 기운이 담겼다가 이내 사그라졌다.'“이쪽이 바로 우리 호텔 기획 관리부와 함께 B/O 전체 관리를 맡고 있는 현승우 본부장. 은근히 까다로우신데다가 은 팀장의 직속상관이니 신경 좀 써야 할 겁니다.”'“은리압니다.”'농담 섞인 수환의 소개를 들으며 리아는 앞으로 다가서는 승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상대를 끌어당기는 듯한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는 승우의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들이 그대로 드러났다.'“현……승웁니다.”'고개를 내린 리아의 눈에 길고 섬세한 남자의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의 작은 손이 승우의 손 안으로 갇혔다가 벗어났다.'수환은 직원소개와 인사를 끝낸 리아를 승우에게 맡겼다. 리아는 앞서 걸어가는 남자를 무표정한 눈길로 응시하며 따라 걸었다.'“아직, 시차적응하기 힘들죠?”'“네?”'아까 인사를 나눴던 것 같은데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옆에서 말을 거는 여자를 바라보며 리아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괜찮아요. 어디 한두 사람이어야 다 기억을 하지. 난, 인사 관리부 서인영 팀장이에요.”'“네, 죄송합니다.”'인영은 악수를 청하며 밝게 웃었다. 리아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더니 어깨까지 툭 쳤다.'“인사 기록파일을 보니깐 나보다 두 살은 어리던데. 앞으로 언니다, 생각하고 얼마든지 도움 청해요.”'“네. 고맙습니다.”'“그래도 한국말을 제법 하네. 참, 말 놓아도 되죠?”'리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인영은 팔짱까지 끼며 길을 재촉했다.'“빨리 가요. 저기…… 본부장님, 말수도 적은 양반이 은근히 까다롭거든.”'인영이 막 비상구 계단 모퉁이로 사라지는 승우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눈길을 따라 리아도 그를 흘끗 바라봤다.'“어서가요. 점심시간에 내가 자기네 부서로 데리러 갈게요. 같이 식사해요.”'“네. 고맙습니다.”'“별 말씀을, 한솥밥 먹는 사람끼리 돕고 사는 거지.”'두꺼운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사무실로 눈길을 주던 인영이 손을 흔들며 자신의 부서로 갔다. '“한솥밥? 그건 무슨 뜻이지?”'인영의 남기고 간 말의 뜻을 곰곰이 되씹던 리아는 길게 호흡을 내쉰 다음,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웅성거리던 소음이 그녀의 등장으로 조용히 가라앉아갔다. 서른 명 남짓 돼 보이는 기획실 직원들의 눈길이 그녀에게 닿았다 떨어지더니 앞에 선 승우에게로 향했다. '리아는 조용한 걸음으로 승우의 옆에 멈춰 섰다. 옆으로 다가서는 리아의 존재를 무시하듯 승우의 시선은 사무실 직원들에게로만 꽂혀있었다.'“아까 소개 받으셨던 홍보마케팅팀의 은리아 팀장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다들 잘 도와주세요.”'짧게 말을 끝낸 승우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쳐다만 보고 있는 직원들의 시선 속에서 리아는 그저 묵묵히 서있었다.'‘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최소한 자리라도 가르쳐 주고 가던가 하지.’'리아가 짜증 섞인 시선을 굳게 닫혀있는 문으로 주었다가 앞으로 돌렸다.'기획 관리부는 홍보마케팅팀, 기획 관리팀, 영업팀, 웹디자인관리팀 등 네 개의 팀이 넓은 사무실을 나눠서 배치돼있었다. '“저기, 팀장님. 홍보팀 김한석 대리입니다. 팀장님 자리는 이쪽입니다.”'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남자직원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와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아, 네. 고맙습니다.”'깔끔하게 치워진 자신의 자리로 간 리아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앉혔다.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상관과 직원들, 생각보다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저 내가 할 일만 잘하면 되겠지. 신경 쓰지 말자.]'그녀는 습관처럼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나서 살짝 고개를 들었다. 후다닥, 재빨리 흩어지는 시선들. '‘그냥 궁금하면 직접 와서 물어보면 될 것을, 뭘 저렇게 겁내는 거지?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나?’'리아의 표정이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낯선 환경, 앞으로 같이 일해야 할 낯선 사람들. 생전 처음 LA인 집을 떠나서 뉴욕으로 대학을 진학했을 때조차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 한국이라는 나라에선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이나 선입견이 무척이나 심한가 보다. 서양인들이 가진 개인주의와는 전혀 다른 어떤 뭔가가 있는 것 같다. '더군다나 아까 그 남자. 벌써 몇 번이나 자꾸 마주친다는 게…….'[거기다 상관이라니.]'영어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그녀의 눈동자가 블라인드가 쳐져있는 승우의 사무실 창으로 향했다.'소개받았을 때 마주쳤던 남자의 눈빛. 숨이 막힐 것 같은 차가운 눈길이었다. 카페에서 마주쳤을 땐, 적어도 그렇게 싸늘하진 않았었다. 하지만 냉기가 감도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은 한눈에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후우! 나도 댁만큼이나 반갑지가 않거든요?] '앞으로 좀 피곤할 것 같은 예감에 리아는 고개를 흔들며 로열 헤레이스의 아시아지역 홈페이지로 접속을 했다.''탁! '“제기랄!”'승우는 등 뒤로 닫은 문에 기대서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뒤로 머리를 쿵쿵 찍다가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풀었다.'하필이면 저 여자가 새로 온 팀장이라니! 되도록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는데…….'악수하며 잡았던 여자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직도 그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에 그대로 남아있는 느낌이다. 승우는 바지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손을 꾹 말아 쥐었다.'“설마…….”'풀어낸 타이를 책상 위로 던지려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뭔가를 떠올리는 듯 그의 눈매가 가늘게 늘어졌다.'“아, 인사팀이죠? 서 팀장 좀 부탁드려요.”'다급한 손길로 전화기를 든 그가 책상에 기대서며 머리를 긁적였다.'“서 팀장? 나 현승웁니다. 다른 게 아니라, 저번에 내가 사는 오피스텔 옆집이 비었다고……. 아, 그랬군요. 아니요. 알겠습니다.”'잔뜩 굳은 얼굴로 전화기를 내려놓는 그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비어있다던 옆집으로 이사 온 사람이 바로 ‘은리아’라는 여자였다. '출장을 가기 얼마 전, 미국에서 새로 발령 받아 온다던 직원의 거취를 사장실에서 알아보라는 지시가 있었다. 인사부에서 골치 아프다고 투덜거리기에 별 생각 없이 옆집 사람이 이사를 간다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이제야 난 것이다.'갈증이 일었다. 아까 그 여자의 까만 동공과 마주치던 순간부터 참기가 힘들만큼 독한 갈증이 덮쳐왔다. 처음 카페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질식감과 함께. 그래서 몇 번이나 넥타이와 셔츠 앞섶을 더듬었는지 모른다.'넥타이를 풀었는데도 왜 이렇게 답답할까? '승우는 구석에 마련된 작은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바짝 마른 목 줄기를 타고 흘러내려간 시원함이 가슴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생수병 하나를 다 비워냈음에도 불구하고 타는 갈증은 해갈이 되질 않았다.'탁! 텅 빈 물통을 휴지통에 던져 넣고 죽어라 노려보는 그의 눈매가 섬뜩하리만치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