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르릉 귓가를 시끄럽게 울리던 뜨거운 태양의 소리는 조금씩 사그라진다. 바람 끝엔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묻어 내고 있지만 새벽녘 차가운 공기는 한기를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매일의 시간 반복 속에서 채희는 조금씩 스며들어갔다. '잠이 가득한 얼굴로 처음 식탁에 앉던 채희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듯 보였다.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희가 커다란 하품을 하자 옆에 있던 작은 녀석도 덩달아 하품을 하며 뭐가 좋은지 까르르 소리 내어 웃는다. 채희도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이마에 뽀뽀를 한다. 태호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언제부터인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히 익숙해졌다고 할 수도 없지만 처음처럼 거부 반응은 없었다. 아니, 반쯤은 포기했다고 하는 게 속이 편했다.'한집에 살았다고 하지만 태호는 호준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눈, 코, 입이 있는 작은 인간 녀석 정도이지 마주 앉아 밥을 먹거나 녀석이 노는 모습을 옆에서 본 적이 없었다. 처음 식탁을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어지럽히던 녀석의 버릇은 사라지고 간간히 떨어지는 밥풀 정도가 옷에 들러붙어 있을 뿐이다. 태호는 작은 호기심에 호준을 쳐다본다. '별 다른 거 하나 없지만 채희가 오고 나서 안채로 옮긴 뒤부터 눈에 띌 정도로 확연히 달라졌다. 거칠고 함부로 물건을 던지던 습관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던 녀석은 툭하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카르르 숨넘어가도록 웃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녀석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한 거야?”'“뭘요?”'채희는 태호가 가리킨 곳을 쳐다본다. 식탁 위엔 연근조림이 보인다. '“그냥, 간장에 조린 후 나중에 물엿을 넣어 다시 한 번 은근히 조리면 되요.”'“그거 말고.”'테호가 턱 짓으로 호준을 가리켜 보이자 채희는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거린다. '“그 녀석도 간장에 조린 건가, 아주 알맞게 조려진 것 같은데.”'태호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채희는 소리 내어 웃는다. '“그렇죠, 요즘 땅강아지처럼 너무 나가 놀았는지 햇볕에 그을린 것 좀 봐.”'호준의 밥 위에 녀석과 똑같이 생긴 연근조림을 올려주며 채희는 귀여운 강아지라도 되는 냥 녀석의 앞머리를 매만진다. 태호의 얼굴에 순간 미간의 주름이 만들어진다. '“아예 그 녀석까지 먹지 그래.”'불쾌한 기분으로 식사를 마친 후 태호는 사랑채로 향했다. 조금 지나 호준이 녀석이 유치원을 가는지 밖같이 잠시 소란스럽다. 채희가 호준이 녀석을 쓰다듬거나 뽀뽀하며 지나치게 예뻐하는 모습을 볼 때면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다른 사람 앞이나 밝은 곳에서 만지는 것조차 긴장으로 얼어 버리는 채희가 아이인 호준에게 만은 경계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그만 녀석에게 질투를 한다고 생각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낸다. '“아무래도 저쪽이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십팔의 목소리에 태호는 생각을 멈춘다. 고민하는 모습에 오해를 한 모양인지 십팔의 표정이 제법 진지하다. 유치한 생각과 다르게 십팔의 진지한 표정을 보자 어이없는 웃음이 흘렀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태호의 웃는 소리에 십팔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자 더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손님 맞을 준비나 해.”'“예.”'창문을 열자 제법 시원한 바람이 머릿속을 식힌다. 정원에 핀 꽃은 짙은 색과 향기를 내며 회색이던 집에 색을 입힌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보니 제법 시간이 흘러 있었다. 기다리는 손님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잠시 굳은 몸을 풀기 위해 태호는 밖으로 나갔다. 녀석이 돌아온 모양인지 안채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채희와 호준이 녀석은 공놀이에 열심이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두 사람은 태호가 가까이 다가서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호준이 찬 공이 태호 가까이 굴러오자 한순간 멈칫하더니 호준은 그 자리에 서 버린다. 발아래 굴러온 공을 태호는 발끝으로 잡았다. 두 손을 흔들며 채희가 말한다. '“이쪽으로요.”'툭툭 발끝으로 공을 건들며 차지 않자 채근이 이어진다. 시시한 공놀이에 방해꾼이 된 태호는 기꺼이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발에 힘을 주어 높이 찬 공은 채희의 키를 훌쩍 넘겨 담장 가까이에 떨어지자 원망 섞인 비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호는 역할에 대한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두 사람의 시시한 공놀이에 방해자 역할로 시간을 메우던 태호는 중문 가까이 들어서는 낯선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옆에 십팔이 나란히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태호는 자리를 벗어나 가까이 다가갔다. 방문객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낯이 익었다. 남자 역시 태호를 알아보고 놀란 기색이 드러낸다. 태호는 웃으며 남자를 반겼다.'“재미있는 우연이군. 내 집에서 당신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서인지 이거 상당히 반갑군. 당신이 더군다나 기다리는 손님으로 말이야.”'“저야 말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남자는 조금은 들뜬 음색을 띠며 말했다. '“우리말이 많이 늘었군, 그래서 이번 협상에서 마지막으로 바뀐 게 당신인가?”'소박한 남자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과 함께 웃음이 나온다. '“하하하,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한국어를 모른 척하고 협상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거 상당히 곤란하게 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