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카락을 촘촘하게 땋아 묶은 작은 계집아이는 자신의 주먹만 한 절굿공이로 열심히 약초를 찧었다. 햇빛에 말라 바삭거리는 약초가 돌로 만든 절굿공이에 고운 가루로 변했다. 표정이 없는 계집아이는 작은 손을 내려 절구에 있는 가루를 만져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푸스스 날리는 녹색 가루가 고운 모래처럼 폭닥폭닥 보드라워 기분이 좋았다. 향긋한 약초 향이 코를 간질였다. '“유하야.”'운소낭낭(雲宵娘娘)은 절구통에 작은 머리통을 디밀고 있는 제자의 이름을 한 번 더 크게 불렀다.'“유하야!”'계집아이는 스승의 음성에 놀라 웅크린 몸을 퍼뜩 세워 돌렸다. 스승의 엄한 눈길이 내리꽂혔다. 아주 잠시나마 느슨해진 자신을 꾸짖는 듯했다.'운소낭낭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 금세 긴장하는 계집아이를 보며 세 번째로 이름을 불렀다.'“유하야.”'“네, 스승님.”'계집아이는 작지만 또렷한 어조로 답했다.'그제야 계집아이는 자신의 이름이 유하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이제 자신의 이름은 유하다. 유하가 된 것이다.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돼. 지난 이름 따위는 꿈속에서라도 떠올리지 말아야지. 만약 다시 유하라는 이름을 잊어버린다면 스승님께서 날 궁으로 돌려보내실지도 몰라.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스승님과 단둘이서 지내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다.'검은 우물 같은 깊고 커다란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불안감을 읽은 운소낭낭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아이가 무엇을 겁내는지 알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차츰 나아질 것이다. 그녀의 제자가 된 이상 스스로 걸어 나가지 않는 한, 자신이 내쫓는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하늘의 별이 가르쳐주었다. 운소낭낭이 계승한 선문의 새로운 후계자가 황궁에 있다는 것을. 한눈에 선근을 타고났음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황족이라 선뜻 손을 내밀기가 망설여졌다. 구중궁궐에서 고이고이 자라는 아이일 터. 부족한 것 없이 지내는 아이에게 고된 길을 가자 한들 따라나설 것인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을 두고 본 아이의 형편은 근심 걱정 없는 황녀라고 볼 수가 없었으니.'아이의 침착하고 조용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차분한 눈빛으로 바라만 보던 아이였다. 결코 쉬운 이야기가 아닌데도, 가만히 듣고 있다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하느냐 되물은 아이였다. 어딘가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분함이었지만, 아이가 지내는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있긴 했지만, 황궁에서 편안히 지내다 갑자기 험한 일을 하게 되었음에도 한마디 불평도 없이 무던하게 해나가고 있었다. 그만큼 사람의 온기에 굶주렸다는 의미이리라. '“그것을 다 빻았으면 차를 끓여라. 다기와 찻잎은 백왕이 가르쳐줄 것이다.”'“예, 스승님.”'어느새 백왕이 달려와 유하의 한 손을 낚아챘다. 어서 자신을 따르라는 듯.'“잠시만, 백왕. 이 가루를 병에 넣을 때까지만 기다려줘.”'폴짝폴짝 뛰며 재촉하던 백왕은 조용조용한 유하의 타이름에 얌전히 꼬리를 내렸다. 운소낭낭의 입가에 작은 실소가 맺혔다. 장난기 많은 백왕이 주인을 만났군. 백왕도 유하가 마음에 드는지 제 보금자리보다 유하의 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백왕이 집어준 통의 찻잎을 본 유하는 눈가를 찡그렸다. 찻잎의 종류를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차지? 찻잎의 모양이 제각각 조금씩 달랐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걸음을 옮겼다. 화로 앞에 웅크리고 앉아 제 얼굴만 한 부채를 살랑살랑 부쳤다. 부채질을 따라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복숭아 꽃잎이 나풀나풀 춤을 췄다.'기이할 정도로 다사로운 공기. 마음을 다독이는 듯한 부드러운 온기가 흘렀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해도 외롭지 않았다. 서럽지 않았다. 다정한 침묵에 동화되었다. 나른한 운곡의 공기에 천천히 녹아들었다.'스승님께 뜨거운 찻물을 내어놓는 유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승님의 입맛에 맞게 끓였는지 걱정스러웠다. 찻물을 한 모금 마신 운소낭낭이 찻잔을 손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이 차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느냐?”'“모릅니다.”'“네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이 세상에 이 차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자는 다섯도 채 되지 않으니. 왜냐하면 이 차를 만든 사람은 나고, 내가 차를 끓여준 사람만이 차의 이름을 알고 있단다.”'유하는 가만히 스승의 말을 기다렸다.'“군산은침이니 벽하운모니 이름난 차가 많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차는 그 사람의 몸에 맞는 차니라. 길가에 핀 들꽃도 차가 되고, 강변에 핀 갈대도 차가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찻잎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차를 마시는 사람의 몸에 이로우냐, 해로우냐다. 차도 약이고, 약도 차가 될 수 있느니. 대대로 선문의 계승자는 차의 달인이었고, 의술을 배워서 의선을 잇는다. 내가 그러했고, 앞으로는 네가 그러할 것이다.”'유하는 훈기가 올라오는 찻주전자를 바라보았다.'선문의 계승자, 의선. 앞으로 그녀가 배우고 익혀 제 것으로 만들어야 할 명호였다.'“내일부터 갑시(甲時)에 일어나 아침을 먹기 전까지 의서를 잃어라. 그 후에는 점심 전까지 나를 따라 약초를 재배하고 약초의 쓰임새를 배우게 될 거다. 점심 후에는 서와 음을 배우고 저녁에는 명상과 다른 학문을 익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