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니?”'떨어지는 벚꽃을 눈처럼 맞으며 해인은 편안한 자세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타칭 러브모드라 불리는 그곳에 놓인 자그마한 벤치는 그가 누워 있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마음이 아팠니?”'‘아프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겠지. 내가 아파한 세월이 있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괜찮은 걸.’'그의 물음에 수화기 너머의 여성의 목소리는 제법 장난스러웠다. 그렇게 나가고 나서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은 것 같았다.'두 사람이 나가고 혼자 남게 된 해인은 사실 많이 걱정하진 않았다. 정훈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그려진 희미한 미소는 이젠 그녀가 그를 보고도 많이 아프지 않다는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걱정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 인양 그렇게 느껴졌었다.'“그런가? 그런데 네 대답이 진심으로 들리지 않는 건 나만의 착각인건가?”'‘내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왜 이러실까?’'그랬다. 누구보다 유란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였다. 이유도 모른 채 별거를 하고, 결국은 이혼을 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자신이 더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인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상처도 많이 아물었고, 아내였던 이와는 친구로도 잘,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정어린 시선은 숨겨두었던 연약한 자신을 들키는 것 같아 싫었다.'“위로주 한잔 어때?”'동정어린 시선만큼 외로움도 싫었다. 따뜻한 햇살이 뺨을 두드리고, 떨어진 벚꽃이 길 위에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이 순간에 외로움은 이따금씩 찾아들었다. 외로움은 아직 해인에게 익숙지 않은, 그래서 이겨내기 힘든 것이었다.'위로주를 이유삼아 자신의 후배를 이용해 외로움을 달래고 싶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란은 그러겠다는 확답을 내놓았다. 그녀의 확답이 들림과 동시에 해인은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누웠던 벤치에는 벚꽃이 그의 흔적을 남기듯 그가 누운 자리를 제외한 채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사람이 난 자리는 알아본다는 말이 이 같음을 해인은 다시 한 번 느꼈다.'양 어깨에 올라앉은 외로움이라는 친구와 함께 약속 장소에 도착한 해인은 아직 오지 않은 자신의 후배를 기다리며 제 앞에 놓인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제법 짜릿한 느낌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나도 같은 걸로.”'짜릿한 느낌에 취해 얼음처럼 가만히 있던 해인의 옆자리에 익숙한 목소리의 여자가 앉았다.'“외로운 방랑자, 뒷모습이 참 쓸쓸해 보여서 말이지.”'“동무 해 주려고?”'“하는 거 봐서.”'유란은 제법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앞에 그와 똑같은 잔이 내밀어졌다.'“가까이 할수록 더 모르는 게 많아지는 것 같아.”'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잔을 들던 해인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멍하니 잔을 바라보는 유란을 바라보았다.'“선배도 그렇고, 정훈이도 그렇고, 알아갈수록 점점 모르겠어.”'“뭐가?”'“글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유란은 자신의 잔을 들어 짜릿한 맛이 나는 그것을 한 모금 마셨다.'“정훈이를 사랑할 때도 그 녀석을 좀처럼 알 수가 없었거든. 가까이 갈수록 내가 몰랐던 것들이 더 나오고 동굴이 더 깊어진다는 것을 느꼈으니까. 선배도 마찬가지야.”'유란은 이제 정훈의 이름에 슬픈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내가 뭘?’이라는 표정으로 해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처음에 선배를 결혼식장에서 다시 봤을 때 이혼했다는 소식을 접했어. 그 뒤론 전혀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예전에는 선배 얼굴만 봐도 ‘아,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통 알 수가 없어.”'“그랬나?”'“신비주의로군.”'유란의 선언하듯 내놓은 한마디에 해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웃지 마. 난 진지하니까.”'“이런 이야길 하는 이유가 뭐야?”'유란의 경고에 해인은 미소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음……. 오늘 내 미련과 마지막 이별을 했다고 전화상으로 이야기를 했잖아. 근데 말이야. 문득 생각해 보니 내가 그 녀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거야. 그 녀석이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그리고 무슨 노래를 좋아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그렇게 좋아, 아니 사랑했는데 말이지.”'“적어도 한 가지는 알았잖아.”'“응?”'그의 대답에 유란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그 녀석이 라디오 PD가 되길 원했다는 거.”'“그거야. 그 녀석이 워낙 자기 입으로 노래를 부르고 다녔으니까.”'“그래서 네가 많이 도움이 되었잖아. 지금의 그 녀석이 있도록 만든 사람은 너야. 그것만으로도 자랑스럽지 않아? 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거.”'“하지만…….”'“유란아. 원래 그런 거야. 멀리서 봤을 땐 제3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파악이 가지만, 점점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갔을 땐 너무 가까워져서 내가 그의 범위 안에 포함되어 버려 객관적인 입장이 될 수 없어. 그렇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사람에 대해 더 모르게 되는 거고. 촛불 밑이 그 주변보다 더 어두운 거. 이거랑 같은 이치 아닐까?”'“그런가?”'“그러니까 넌 그저 네가 한 사랑에 최선을 다해서 전력질주를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만 생각하면 되는 거야. 다가갈수록 더 모르겠다는 이런 잡생각 따위는 던져 버리고.”'한때 해인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자신이 그 사람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한 말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런 잡생각은 던져 버리라는…….'“흐음.”'유란은 그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겠다는 듯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아, 술이 술술 들어가네. 술술 들어가.”'유란은 자신 앞에 놓인 잔을 다 비우고는 어느새 다른 잔을 마시고 있었다. 어느새 3잔째였다. 그녀의 말처럼 술이 술술 들어가고 있었다.'“이봐, 이러다간 나 또 널 업고 너희 집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고.”'“괜찮아. 그리고 오늘은 이해해 주라. 미련을 날려 버린 후배를 그냥 모른 척해 줄 수는 없는 거야?”'유란은 그에게서 다시 잔을 빼앗아들어 남아 있던 것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해인은 그런 그녀를 보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분위기도 좋고, 술맛도 좋고. 앞으로 우리 이런 곳에서 자주 같이 마시자, 응?”'취기가 오른 탓에 유란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띄었다. 오뚝한 코와 자신을 바라보는 옅은 갈색의 눈동자, 그리고 양 볼에 일어난 옅은 홍조가 그녀를 제법 귀엽게 만들었다.'‘네 귀여움에 오늘은 봐준다.’'해인은 그녀의 볼을 살짝 잡고 흔들었다. 그렇게 그들의 힘겨웠던 하루가 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