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내일 선봐.”'순간 세상이 정지한 듯 명훈의 시선이 아득해졌다. '“누구랑?”'“몰라.”'그녀의 말에 명훈은 기가 막힌 듯 입을 벌렸다.'“모른다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랑 선을 본단 말이야?”'미연은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명훈을 마주 보았다'“그거 하나는 알아. 돈이……아주 많은 사람이라는 거.”'“미연아.”'명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는 중이었다.'“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그런 눈으로 보지 마. 작년에 찍은 지면 광고, 그게 내 마지막 일이었어. 그건 너도 알지? 애초에 난 에이급 스타도 아니었고, 나이는 벌써 스물아홉 살이야. 더 이상 드라마 피디들도 광고주들 머릿속에도 내 이름은 없어. 아니, 그 사람들은 벌써 차미연이라는 애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먹은 지 오래일걸.”'미연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렸다. 하지만 짐짓 모르는 척 웃었다.'“이렇게 살다 시집갈 돈도 안 남기고 빈털터리 되기 전에, 더 나이 들어 볼품없어지기 전에 돈 많고 괜찮은 남자 잡아야지. 그래서 나, 이 선 볼 거야.”'“차라리 현승오를 다시 만나. 그 사람도 너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찾아온 걸 테니까.”'“우린 이미 끝났어, 훈아. 알잖아. 현승오는 내가 돈 때문에 자길 만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어. 그리고 그 뒤에 그가 홧김에 한 짓을 봐.”'미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우리 두 사람 사이는, 이제 다시는 좁혀질 수 없어.”'다시 미연을 바라보는 명훈의 눈빛에 분노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녀를 향한 연민이 가득 찼다. 오로지 미연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자신만이 돈 많은 사람과 선을 보겠다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연민이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이런 대화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대화의 끝이 어떨지도 빤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미연에 대한 자신의 남다른 감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그녀 곁에 변함없이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훈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조금만 더 기다리지 그랬어.”'조금 전 삼킨 분노가 무색할 정도로 장난기 어린 명훈의 목소리였다. '“뭐?”'“노처녀 한 명 구제해주려고 난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 먹어가며, 밤새 바에서 편의점에서 일하며 돈 모으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 놓쳤어, 차미연.” '그제야 미연도 긴장이 풀리는지, 어깨에서 힘이 탁 풀렸다.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아껴주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 미연에게 명훈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큰 괴로움이었다.'명훈은 돌아가야겠다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연은 따라 일어서지는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를 배웅했다.'“내일 선보고 나서 가게로 오든지 전화하든지 해. 이 오라버니한테 보고는 해야지.”'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명훈이 나가자 오피스텔 안에는 그녀 혼자 남았다. '‘비꼬지 마.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너야!’'승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미연은 다리를 소파 위로 올려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파묻었다. 승오의 말이 맞았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