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져 가는 백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도영의 심장은, 또다시 구겨졌다. 아프다. 이런 반응 일 줄 어느 정도 예상한 그였지만, 그녀의 냉담한 목소리와 자신의 밀어내는 차가운 손에 오늘도 도영은 아프다. 애초부터 너만은 아프지 말라는 마음으로 다가갔던 것이 그녀에겐 치명적인 독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넋이 빠진 채로 돌계단을 하나 올라섰다. 아니다. 물기를 머금은 잔디를 밟으며 들어섰다. 나는, 너에게 결코 동정일 수가 없다. '정원을 슬피 맴도는 그의 목소리.'“이렇게…… 심장이 뛰고 있는데.”'도영이 불이 켜진 백의 집을 빤히 쳐다보았다. 빗줄기 사이로 위태로이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안개 속에 파묻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처진 등 위로 가득 올려 매고 있는 저 슬픔이란 단어를. 그녀는 언제까지 짊어질 생각인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아까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을 때 오들오들 떨었던 그녀를 떠올렸다. 계속해서 수척해져 가는 그녀의 얼굴과 앙상한 팔, 그리고 식어버린 심장. '무슨 생각에서인지 도영은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커다란 거실, 휘황찬란한 가구들, 들어서자마자 앞치마를 맨 가정부 아주머니가 도영을 반기고 아버지의 비서관이 자신을 반겼다. 백이 도영에게 다가가기 어려웠던 벽이 이것이었을까. 도영은 그런 그들을 젖혀두고 비상약들이 담겨 있는 상자를 뒤적거리다 도로 다시 밖으로 달려 나갔다. '“도…… 도련님?”'동정이 아니다. 너를 향한 내 마음은 결코 동정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는. 한 달음에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굵은 빗방울은 젖어버린 옷을 두들겨대고 있었지만, 약봉지를 손에 쥔 그의 낯빛의 아까 보다 밝았다. 확신에 찬 얼굴. 결단에 찬 그의 얼굴. '불빛이 새어나오는 백의 집. 이 문만 열면 이젠 그녀가 보일 것이다. 보자마자 꼭 안아줄 것이다. 그녀가 그를 뿌리치지 못하게 두 번 다시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못하게 그의 마음을 다 열어주어, 그녀를 활짝 보듬어 줄 것이다. 떨리는 손이, 현관문을 두들기려 닿았을 때였다.'“그……만…… 그만…… 제발……그만 하란 말이야!.”'그토록 보고 싶었던 백이였다. 하루라도 안 보면 죽을 거 같은 백이가 있다. 분명히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목구멍은 삽시간에 막혀버렸고 약봉지를 들고 있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옷이 쥐어뜯긴 채. 활짝 웃은 적도 몇 없었지만 단 한 번도 도영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녀가 울고 있다. 한 남자의 둔탁한 손길에 그녀의 속살이 드러났고, 한 남자의 강압스러운 손길에 처음으로 사랑했던 백이가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의붓아버지에게 희롱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부들부들 떨려오는 도영의 손. 머릿속 도영의 손은 벌써 저 식탁 너머 꽂혀 있는, 칼을 쥐어 들어 의붓아버지의 심장을 난도질하고 있었건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다. 여전히 약봉지를 쥐어짜고 있다. 발버둥 치던 백의 두 눈이 도영과 마주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백의 눈동자가 도영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 눈동자가 도영을 향해 엉엉 울었다. 살려달라고 구원해달라고.'울고 있다.'그녀도 울었고.'나도 울었다. '‘……우리 집은 니 방 반만도 못하고. 엄마는 2년 전 나를 버리고 도망을 갔어. 그렇다고 너희 집 기사로 일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도 아냐. 것도 의붓아버지야. 어디 하나 편한 곳이 없어 의지할 사람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난데 이렇게 보잘 것도 없는 내가 좋다는 건.’'‘……좋아해…….’'‘동정이야.’'꼭 하얗게 핀 백합과도 같았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그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 품에 갇혀 잎사귀가 붉게 물들어가도 살려달라고 나를 향해 울부짖어도 나는 멍청하게도 그 자리에 서서 눈만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 방법이 그녀를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지독하게도 나약했다. 번쩍이는 번개와 함께 요란한 천둥소리 아래, 두 남녀가 울었다. 숨을 죽이고 울었다. '''그 때의 난 흩날리는 벚꽃도 코 끝을 맴도는 아카시아 향내도 모두 증오스러웠다.